또 다시 네트워킹 기회를 앞두고 압도된 내향인의 자기분석
한국에서도 영국에서도 네트워킹이 많은 기회를 열어 준다. 미국에서 영국으로 이민 온 플랫메이트와 그의 애인은 네트워킹의 고수인 것 같다. 둘다 사람 만나는 것을 즐기고, 자기 얘기를 하는 것도 즐기고, 유용한 인맥을 쌓아서 "나 그 사람 알아ㅎ" 하는 데서 충족감을 느끼는 것 같아 보인다. 전세계에 친구도 많다. 내향인으로서는 참 미스테리이면서도 박탈감이랄까 조바심이 느껴진다.
회사 차원에서 네트워킹 이벤트에 종종 갔는데, 그 때도 제품 얘기만 했다. 네트워킹이라기보다는 프로모션에 가까운 대화 방식이었다. 내향인 컬렉터*로 추정되는 외향인이 나를 챙겨 주고 데리고 다니며 여기저기 소개해 줄 때나 좀 대화를 나눴으나 그 때도 딱히 관심이 가지 않아서 아무 소득 없었다.
* 내향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는 외향인
네트워킹 이벤트를 주최하는 부서에서 일한 적도 있다. 내가 네트워킹 하는 상황은 아니었으나 기회가 차단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주최측으로서 대화를 시작할 구실도 많았기에 열심히 네트워킹 했다면 유용한 인맥이 좀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학회 같은 데서도 사람들이 저절로 대화를 나누니까 같이 대화는 나눴으되 딱히 재미가 없었다. 누구라도 네트워킹이 재밌어서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뭔가 만족감이나 고양감, 보람 같은 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네트워킹에 왜 흥미가 안 가는지 몇 가지 이유를 찾아 보기로 했다.
쿵짝쿵짝 음악을 트는 이벤트도 있고, 그렇지 않은 행사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대화가 오가기 때문에 시끄럽다. 시끄러울 때 남의 말에 귀기울이는 것도 정신적으로 너무나 고되고, 내가 목청 높여 이야기하는 것도 지친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수어에 유창해지기 (비현실적)
다가가서 나를 소개하고 '너무 시끄러워서 대화하기가 어렵다'거나 '다음 일정이 타이트해서 빨리 가봐야 하지만 꼭 연락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며 연락처만 얼른 교환한 뒤 이메일로 추후 네트워킹을 이어가 볼 수 있을까?
네트워킹을 할 경우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바라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타인이 내게 필요한 것처럼 타인에게도 내가 필요한 것까지는 알겠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포맷의 대화가 나눠져야 하는지, 어떤 스탠스를 취하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면 좋은지, 어떤 주제를 꺼내야 하는지, 얼만큼의 스몰톡을 나누고 얼만큼의 본론을 나눠야 하는지 등등 기본적인 스크립트가 없다. 사회생활을 알고리듬처럼 처리하는 신경다양 내향인이므로 네트워킹도 스크립트를 짜서 실전 연습을 많이 해 봐야 되지 싶다.
괜찮은 온라인 강좌를 찾아 봐야겠다.
잘하는 사람을 찾아서 따라다니면서 배워보기? (그 사람은 누구이며 어떻게 같이 행사에 갈 수 있나)
선뜻 다가가기가 부끄러우며 거절 당할까 봐 걱정된다. 나를 안 좋게 볼까, 혹시 타인이 내게 상처 되는 말을 할까 걱정이다. 그러면 나의 자신감이 너무 상처입을까 봐 꽁꽁 싸매고 보호하고 싶다. 이것은 어쩌면 좋은가? 사실 요즘 개인적으로 남이 나를 안 좋게 볼까, 내게 화가 날까 걱정이 많이 되는 경향이 생겼다. 이민 초기이기도 하고 하도 새로운 사람을 안 만난지 오래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상담치료...? 이미 해봤지만 좀 더...? GP 만나면 상담을 연결해 달라고 말해야겠다. (오래 걸림)
부딪쳐 보기 (어려움)
말을 잘해야 한다거나 기억에 남아야 한다거나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 놓기
인생 전반에 걸쳐서 사회생활에 에러가 생기는 부분인데, 내 얘기를 딱히 하고 싶지가 않다. 자기 개방성이 낮은 타입이라고나 할까. 좋아하는 사람에게나 말하고 싶지 모르는 사람에게 굳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든다. 하지만 상대도 나에 대해 정보가 있어야 인맥이 형성되는 것이니 뭐라도 말을 해야 한다.
해당 이벤트에 참석한 사람들의 관심사와 관련있는 나의 사실들을 추려서 자기소개 및 나에 대해 할 말을 미리 만들어 가기 (2번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과 연결됨)
흥미로운 에피소드 레퍼토리를 구축하기 (어려움)
상식적으로 이상한 말이 될 수도 있고, 나를 비난하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비난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일 수도 있는데 꼭 네트워킹 같은 자리에 가면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다수는 안전한 영역에 머무는데 꼭 희한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왜 있는지 모르겠으나 있다. 그런 자를 만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고, 순발력 없는 나를 자책하기도 하고, 전의를 상실한다.
할 수 있는 말의 스크립트를 짜보자. 발언의 수준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있네요'에서부터 '저는 반대해요' '저는 (다른 주제)에 더 관심있어요' 같은 대사를 미리 준비해 보면... 아 무슨 준비할 일이 이렇게 많은가...
쓰다보니까 해결책 대부분이 미리 공부하고 준비하기라서 좀 하기 싫어졌다. 이 글도 마무리하기 귀찮아졌다. 이민자로서 아는 사람도 없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데 뭐 열심히 하는 수 밖에 없겠다. 다른 신경다양 내향인들은 어떻게 하고 사는지 궁금하다. 다같이 괴로워 하면서 속으로만 앓고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궁금하다....
사진: Unsplash - Kelsey Ch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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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율 / sunyool@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