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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항현 Mar 21. 2022

모래더미 모형으로 하는 모래알 유희

KIAS 뉴스레터 과학의 지평 42호 (2010)

헤르만 헤세의 소설 『유리알 유희』는 진리를 추구하고 지성의 명맥을 잇는 카스탈리엔이라는 이상적인 학문 공동체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곳에는 음악, 언어, 수학 등 각 분야의 명인들과 함께, 여러 학문과 예술을 종합하고 이를 고도의 지적인 유희를 통해 표현하는 유리알 유희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정신적인 활동이 서로 통한다고 믿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믿음이나 즐거움을 현실의 제 모습과 직접 비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처음 모래더미 모형(sandpile model)을 접하고 이끌렸을 때의 즐거움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소설 제목을 흉내내어 이 글의 제목을 ‘모래알 유희’라고 써봤습니다.


하얀 종이 위에 원뿔 모양의 모래더미를 그려 넣고 모래알을 하나씩 떨어뜨리는 상상을 해봅시다. 모래알은 떨어진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때도 있고 다른 모래알들과 함께 굴러내리기도 합니다. 굴러내리는 경우는 굴러내리는 곳에서 모래더미의 기울기가 어떤 문턱값보다 클 때입니다. 그렇게 굴러내리다가도 언젠가는 멈추기 마련입니다. 멈추고 나면 다시 새로운 모래알을 떨어뜨립니다. 이렇게 모래알을 쌓고 굴러내리게 하고 다시 쌓고 또 굴러내리게 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고 무너뜨리고 다시 쌓고 또 무너뜨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모래더미는 물처럼 어디든 흘러가버리지도 않고 철골에 시멘트를 바른 성처럼 튼튼하지도 않지만, 우리는 그 모래더미에서도 ‘보편성’이라는 견고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보편성은 모래더미에 모래알을 끊임 없이 쌓고 굴러내리게 하는 과정에서 나타납니다. 매번 단 하나의 모래알에서 시작되어 굴러내리다 마침내 멈추고 마는 모래알들의 활동을 하나의 사태(avalanche)라 부릅니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의 모래알이 일으키는 사태는 거의 아무런 파장도 일으키지 못하지만, 종종 모래더미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커다란 사태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물론 작은 사태도 커다란 사태도 단 하나의 모래알에서 시작되므로 작은 사태를 일으킨 원인은 작고 커다란 사태를 일으킨 원인은 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의 모래알이 어떤 크기의 사태를 만들어낼지는 직접 그 모래알을 떨어뜨리지 않고는 쉽게 알 수 없습니다. 사태의 크기를 매번 기록하여 이들의 확률분포를 보면 아래와 같은 거듭제곱 분포(power-law distribution)가 나타납니다.

이 거듭제곱 분포를 특징짓는 거듭제곱 지수(power-law exponent) τ가 시스템에 내재한 어떠한 대칭이나 특정한 성질만 같다면 세부사항이 달라도 같은 값을 보여준다는 사실이 보편성을 뜻합니다. 거듭제곱 꼴은 부분을 확대해도 전체와 비슷한 모양이라는 자기유사성, 즉 규모 불변(scale invariance)을 수식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는 또한 시스템을 이루는 각 부분의 상호작용 범위가 가까운 이웃으로 제한될 때에도 이 상호작용의 연쇄로부터 거시적이고 집합적인 성질이 발현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거듭제곱 지수는 바로 이 거시적인 성질을 정량화해서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시스템에 내재한 다양한 요인들 중 거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중요하다(relevant)고 하며 중요한 것들을 그렇지 않은 것들로부터 체계적으로 가려내고 정리하는 일이 보편성 연구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보편성’의 관점으로 보면, 모래더미의 사태와 비슷한 일들이 다른 다양한 시스템에서도 나타난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래더미의 모양이나 색깔 또는 모래알의 종류가 아니라 ‘사태’에 초점을 맞춘다면, 결국 한곳에서 시작된 작은 요동이나 자극이 이웃한 곳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때론 시스템 전체로 퍼져나가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태를 작은 자극이 불러일으킨 활동의 연쇄반응으로 정의한다면, 초전도체의 소용돌이, 지진, 생물 진화, 주식 가격의 변동 등 다양한 현상에서 나타나는 활동의 연쇄반응이나 거듭제곱 분포도 같은 맥락에서 논의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어떠한 대칭’과 ‘특정한 성질’만 같다면 그 시스템이 지진이든 진화든 주식시장이든 같은 거듭제곱 지수로 기술되어 같은 보편성 부류(universality class)로 묶일 것입니다. 물론 매우 다르게 보이는 두 현상에서 같은 거듭제곱 지수가 관찰되었다고 해도, 결국 그 값은 각 현상의 맥락 안에서 서로 다르게 해석될 것입니다.


이제 모래더미 모형을 소개하겠습니다. 1987년에 퍼 박과 그의 동료들(P. Bak, C. Tang, K. Wiesenfeld)이 처음 이 모형을 제시했을 때 이들은 자연 어디에서나 관찰되는 자기유사성 구조와 1/f 노이즈를 설명하기 위한 일반적인 메커니즘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모래더미 모형은 위 두 가지 특징을 성공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기존의 통계물리 연구에서는 온도 등의 조절변수를 미세하게 조율해야만 임계현상이 나타나는데 반해 모래더미 모형은 변수들을 조율하지 않아도 스스로 임계상태에 이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러한 견고함이 자연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규모 불변을 설명하는데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며, 박과 동료들은 이를 ‘자기조직화 임계성(self-organized criticality)’이라 불렀습니다. 이들 이후에도 다양한 모래더미 모형이 제시되었지만 가장 간단한 형태를 먼저 소개합니다.


1차원 격자의 각 자리에 2라는 문턱값(threshold)을 지정하고, 각 자리의 모래알 개수가 문턱값보다 작은, 즉 0 또는 1개만 있는 안정한 배열(stable configuration)을 생각합니다. 아무 자리나 하나 골라서 모래알을 하나 떨어뜨린 후 그 자리의 모래알 개수가 문턱값 이상이라면 그 중 2개를 빼서 양옆 자리에 하나씩 줍니다. 이걸 무너지기(toppling)라고 합니다. 모래알을 받은 옆 자리도 무너질 수 있고 이로 인해 또 그 옆자리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격자의 양 끝 자리에서 무너질 경우에는 두 모래알 중 하나를 시스템 밖으로 버립니다. 더 이상 무너질 자리가 없으면, 즉 다시 안정한 배열이 되면 사태는 끝납니다. 그리고 다시 모래알 하나를 떨어뜨리고 또 다른 사태가 시작됩니다.



이 모형은 아벨 대칭(Abelian symmetry)이 있으며 결정론적(deterministic)입니다. 일단 모래알이 떨어진 후 사태가 끝날 때까지 무작위적인 요인이 없어서 결정론적입니다. 그리고 모래알 두 개를 두 자리에 순서대로 떨어뜨린 결과나 떨어뜨린 순서를 바꾼 결과나 똑같아서 아벨 대칭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 모래더미든 모래더미 모형으로 본떠서 이해할 수 있는 다른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벨 대칭이 있고 결정론적인 모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벨 대칭이 깨진다거나 무너진 모래알들이 확률적으로 이웃을 선택하여 움직인다면 보편성이 바뀔지, 즉 사태 분포의 거듭제곱 지수가 바뀔지 아니면 그대로일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벨 대칭을 깬 모형은 1989년 장(Y.-C. Zhang)에 의해 처음 제시되었습니다. 각 자리에는 연속적인 값을 갖는 에너지가 있으며, 문턱값을 넘긴 자리의 ‘모든’ 에너지를 이웃한 자리에 골고루 분배하는 규칙에 의해 아벨 대칭이 깨집니다. 1991년에는 확률적 무너지기를 도입한 모형이 만나(S. S. Manna)에 의해 제시됩니다. 무너지는 자리의 각 모래알은 이웃한 자리 중 무작위로 하나를 선택하여 옮겨집니다. 편의상 아벨 대칭을 A, 이 대칭이 깨진 것을 N, 결정론적 무너지기를 D, 확률적 무너지기를 S라고 한다면, 모두 네 가지 조합(AD, AS, ND, NS)이 가능합니다. AS의 경우, 즉 확률적으로 무너지면서도 아벨 대칭이 여전히 존재할 수 있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모래알이 움직일 때마다 어디로 튈지 모르므로 개별 사태들에 의한 결과만 보면 당연히 대칭이 깨지겠지만 그 결과들의 확률분포를 비교대상으로 삼는다면 앙상블 평균이라는 관점에서 아벨 대칭이 성립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N이든 S든 보편성을 바꾸지 않는다고 주장되었지만 컴퓨터가 발달하면서 더 커다란 크기의 격자에서 다양한 양들을 측정하면서 시늉내기한 결과 N과 S 모두 보편성을 바꾼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컴퓨터 시늉내기 결과에 근거한 논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2차원 이상 윗임계차원(upper critical dimension) 미만의 시스템에 대한 정확한 해(exact solution)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불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방향성 있는 모래더미 모형(directed sandpile model)에서는 AD와 AS의 정확한 해가 존재합니다. ‘방향성 있다’는 말은 모래알이 무너질 때 한쪽 방향으로만 움직인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2차원 사각 격자를 45도 기울인 후 모래알들이 아래 방향으로만 굴러가는 규칙을 도입합니다. 모래더미가 놓여 있는 판을 약간 기울임으로써 비슷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모래알은 맨 윗 줄에서만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AD에서 사태의 가장 바깥 부분, 즉 경계는 마구 걷기(random walk)로 정확히 본뜨기가 되므로 이로부터 사태에 관한 모든 거듭제곱 지수가 곧바로 유도됩니다. AS도 사태 속의 모래알들의 흐름을 기술하는 흐름 방정식(flow equation)을 쓰고 이를 풀어서 정확한 거듭제곱 지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결론만 말하면 AS는 AD와는 보편성이 다릅니다. 확률적 무너지기에 의해 무너진 모래알들이 모두 같은 이웃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생겨서 사태의 높이도 점점 커집니다. 사태의 높이에 관한 거듭제곱 지수가 새롭게 도입되어 보편성이 바뀝니다. 그래서 S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방향성 있는 AD는 1989년에 처음 연구되었는데,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2000년에서야 방향성 있는 AS에 관한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곧 2002년에 방향성 있는 NS가 제시되었습니다. 이 연구자들은 아벨 대칭을 깸으로써, 사태가 끝난 후 모래알의 배열, 즉 준안정 상태(metastable state)가 프랙탈 구조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이 프랙탈 구조를 기술하는 거듭제곱 지수를 새로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사태 분포의 거듭제곱 지수는 AS의 값들과 오차범위 내에서 일치하는 결과를 얻습니다. 사태 지수는 같은데 준안정 상태 지수가 다르다면 이 둘이 같은 보편성 부류에 속한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몇 년 후 다른 그룹에서 방향성 있는 ND를 제시하고 시늉내기 결과 기존의 AD, AS, NS와는 다른 보편성을 보인다고 주장했습니다. 카이스트 하미순 박사님과 저는 기존에 알려진 다양한 방법론을 이용하여 방향성 있는 모래더미 모형들을 분석해보았습니다. 다른 모형들과는 달리 ND의 경우 N과 D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가장 간단한 모형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2차원 격자 위의 AD에서 무너지기는 모래알 2개를 왼쪽 아래 자리와 오른쪽 아래 자리에 하나씩 전달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를 ND로 바꾸면 무너지는 자리의 모래알을 모두 왼쪽 아래와 오른쪽 아래 자리에 골고루 전달하게 하면 됩니다. 무너지는 모래알 개수가 짝수라면 문제없지만 홀수일 때는 골고루 나눈 후 마지막 하나의 모래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따라 여러 하위 모형이 제시됩니다. 컴퓨터 시늉내기 결과와 흐름 방정식을 이용한 논의 결과 모두 2차원 ND는 모래더미 모형의 평균장(mean field; MF) 결과임을 보였습니다. 우리는 사태가 지나가면서 남긴 경계의 흔적(scar)이 곧 준안정 상태의 모래알 배열이라는 직관에 근거하여 사태에 관한 지수 중 하나가 준안정 상태 지수와 같다는 사실을 보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연결 고리로부터 AS와 NS가 준안정 상태라는 겉모습은 달라도 실제로 같은 메커니즘에 의해 같은 보편성 부류에 속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방향성 있는 모래더미 모형에서 얻어진 결론이 방향성 없는 모래더미 모형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이후의 과제입니다.


이런 흐름 외에도 모래더미 모형이 정말 ‘자기조직화’ 모형인지에 대해 이미 오래전부터 많이 논의되어 왔습니다. 조절변수의 미세 조율 메커니즘이 이미 모형에 숨겨져 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면 이 메커니즘을 드러냄으로써 모래더미 모형을 기존의 비평형 상전이의 틀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미 말했듯이 보편성에 관한 이러한 연구 흐름은 물리적 현상을 넘어서서 흔히 복잡성 과학(complexity science)이라 부르는 더 커다란 범주로 확산되어 왔습니다. 여기서도 보편성 연구의 성과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이렇게 보편성을 발견하고 이해함으로써 얻어진 통찰이 소설 속 카스탈리엔의 유희자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일 거라 믿으며 서둘러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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