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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마치 Apr 25. 2021

그대여, 우리 자존심은 잊어버려요

영화 <비포 선라이즈>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람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눈 MBTI가 생기자 그나마 '다름'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서로의 생각과 감정이 기질적으로 충분히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사고가 났는데 괜찮냐고 물어야지, 진짜 '보험은 돼 있냐'는 말이 먼저 생각 나?"

"우리 'T'들로선 그게 최선의 걱정인 거지."

"세상에.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가지만 '다름'을 인정. 이게 일리가 있는 검사네."


우리를 스쳐 지나간 많은 관계와 이별 속에서, 어쩌면 아주 못돼먹은 잘못을 한 사람은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 단지 너와 내가 달랐을 뿐. 내가 그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가 나의 행동을 납득할 수 없었던 건 '그렇구나'라는 이해보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마음이 더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Baby, let's forget about this pride
그대여, 우리 이런 자존심은 잊어버려요 

-비포 선라이즈 ost 'Come here' 중에서



스무 살 무렵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처음 봤을 때 '저런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끊임없이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고 티키타카가 자연스러운 관계. 참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통하는 게 있는 사람과의 만남.  삶과 죽음 같은 철학을 논하다가도 어린 시절 추억을 끄집어내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넘어가는 대화.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은 기차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부터 헤어지는 순간까지 쉴 새 없이 떠든다. 어떤 목적이나 방향성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계속 나눈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멜로의 기운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행이라는 특수한 상황도 한 몫한 건 사실이다.







-네가 돈을 냈으니까 손금쟁이가 기분 좋은 말을  준거지, 그냥 오늘의 운세 같은 거야.
- 좋았어. 우리가 모르는 사이라는  맞췄잖아.



-상대의 습관에서 싫증을 느껴서 싫어지는  같아.
- 정반대.  상대에 대해 완전히 알게   사랑에 빠질  같거든.





낯선 곳에서의 만남은 설렘을 불러오고, 그 설렘은 누군가를 이해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때로는 단점보다 장점을 먼저 보이게 한다. 나와 같은 여행자 거나 나와 아주 먼 곳에 사는 사람이니까 '그래 여기서라면, 너라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유럽 여행을 할 때 목적지 없이 떠도는 프랑스인을 만났었다. 멋져 보였다. 평소라면 '갈 곳 없는 노숙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텐데. 그에게 여행할 돈은 어떻게 버는지, 가족은 어디에 사는지 묻지 않았다. 궁금한 건 "그래서 네 다음 행선지는 어디야?"였다. 그는 스페인으로 가고 싶다 말했고,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스페인 음식으로 넘어갔다. 그의 여행에 동행한 것도 아닌데 이미 맛있는 스페인 요리 한 접시를 먹은 듯 머릿속엔 그 생각뿐이었다. 기분 좋은 웃음이 오가고, 여유가 철철 흐르는 대화였다. 그러나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우리는 사랑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는 걸. 9시간 너머 한국 땅에 있는 나의 현실로 당신을 끌고 들어가면 나는 결코 당신에게 이렇게 공감해 줄 수 없을 거라고.






현실과 조금 동떨어진 세상에서 만난 제시와 셀린의 하루는 셀린의 엉뚱한 제안으로 마무리된다. 서로의 연락처와 주소도 알려주지 말고, 딱 6개월 후에 같은 곳에서 만나자고. 이 감정이 한 때일 것이라는 셀린의 불안한 마음은 백번 이해가 된다. 그래도 연락처도 없이 헤어진 건 제시에게도 셀린 자신에게도 가혹했던 게 아닐런지. 아무리 아름다운 비엔나라는 도시가 사랑에 불을 지폈다고는 해도, 두 사람이 눈빛과 사랑으로 통하는 게 있었으니 끊임없이 밀고 당기며 대화가 끊이지 않는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우리가 여행지에서 만난 생면부지의 모두와 사랑에 빠지는 건 아니니까. 


<비포 선라이즈>와 여행지에서의 우연한 만남이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주는 마음이 좋아서다.   바람대로 <비포 선라이즈> 같은 연애와 이해 넘치는 대화를 하려면 일상을 여행처럼 살아야 하는 걸까자존심이나 계산 같은 거 없이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은 평소의 현실에서라면 쉽지많은 않으니 말이다. 나와 다른 누군가와 만나 대화를 하며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기쁨과, 비슷한 점에서 손뼉 치며 공감할 수 있는 기쁨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절대 이해할 수 없다가도 한없이 그의 말이 맞는 때가 오기도 하니까. 


만약  제시와 셀린이 헤어지는 기차역에서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면 행복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설레던 하루의 추억에 조금씩 현실이 비집고 들어왔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비포 미드나잇>에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스스럼없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관계가 단지 여행 중이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나는 아직도 <비포 선라이즈>의 순간을 기다린다.



Before Sunr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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