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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이 Feb 06. 2023

모든 것은 지나간다

인간실격의 한 구절이 문득 내 삶을 침투했다


인간실격을 읽었던 적이 있다. 청소년추천도서로 떡하니 자리매김한 그 책을, 꽤 여러 번 시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읽을 때마다 번번이 낭패감을 맛보아야 했다. 읽을 수 있지만 해석할 수 없었다. 견고하고 깊은 문장들은 내게 질감으로 다가올 뿐 어떤 울림도 주지 못했다. (다행히 삶의 장면이 여럿 쌓인 후 읽게 되었을 때는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아졌다.)


대학교 2학년 때였다. 그 책을 ‘또’ 시도했다. 들컹이는 버스 안에서 나는 끝페이지를 보고 생각에 잠겼다. 주인공은 우울증 환자인가? 나는 무엇을 읽었나? 카드를 갖다 대고 하차를 찍은 내 머릿속에 남은 것은 ”모든 것은 지나간다.“ 라는 문장 한 토막이었다.


오늘은 참 힘들었다. 안 힘든 날이 없어서, 힘들다고 표현하는 것조차 진부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힘들었다고 힘주어 표현하고 싶다. 자세히는 이야기하지 못해도, 직장에서 예정된 어떤 일정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이 때문에 저번주부터 생각만 나면 침울에 빠지곤 했다. 그리고 싱숭생숭하게 맞닥뜨린 오늘, 직장에 가는 나는 처음 출근을 하는 것처럼 쭈뼛거렸다. ‘그 일정’이 다가올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생각보다 시간은 미적지근하고 평이하게 흘렀다.


그 일정이 끝난 후, 아주 오랜만에 배드민턴 센터를 찾았다. 원래라면 비슷한 시간대에 레슨을 받는 사람들끼리 자유롭게 배드민턴을 치며 땀을 쏙 빼곤 하는데, 코치님이 저번달부터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그 말이 진짜인지, 사람이 많아 북적였지만 그들은 모두 코트를 대여하는 사람들이었다. 레슨을 받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기다리다가 실망하고는 옷을 챙겨 입고 나왔다. 문을 덜컥 닫는데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학업 때문에 잠시 레슨을 그만두고, 시험을 모두 치르면 다시 오겠다고 나와 약속한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나와 그는 반갑게 인사하고, 남는 코트에서 익숙한 자세로 게임을 했다.


배드민턴을 끝내고 31번 버스 안에서는 목요일에 있을 독서모임을 위해 벽돌처럼 두꺼운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인간실격>을 읽었던 그때처럼 두 눈이 재빠르게 활자를 좇았다. 오늘만 자그마치 100페이지를 읽어야 했기에 마음이 조급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왼손에는 배드민턴 채가, 오른손에는 벽돌만 한 소설이 들려 있었다. 우연히 대학교 2학년 때 읽었던 인간실격의 구절이 생각났다. ㅡ아마 우연이 아니라 인연이었을 것이다ㅡ 모든 것은 지나간다. 순간 그 문장이 살아서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독서가 삶에 녹아드는 때가 있다면  바로 이때가 아닐까. 모든 것은 정말 지나간다. 힘들어하던 순간도, 견딜 수 없을 것 같던 순간도, 종국에는 모두 지나간다. 미래는 현재가 되고, 현재는 과거가 된다. 나는 또다른 미래를 걱정하고, 그것이 현재가 또 과거가 되는 과정을 겪겠지만 모든 것은 지나간다. 이 명제만 떠올린다면 삶의 고통은 배로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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