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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이 Sep 02. 2023

사과 없는 용서

가족을 용서하는 과정


  엄마는 비행기를 처음 타본다고 했다. 그녀는 창밖을 연신 쳐다보며 신기해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며 웃기도 했다.


  “이거 언제 출발하는데?”

  “곧 출발해.”


  싱거운 대화와 함께, 비행기는 허공을 가로지르며 제주도로 향했다.


  제주도에 도착해서는 먼저 안마를 받기로 했다. 여러 각도로 휘고 굽은 엄마의 어깨가 내내 신경쓰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어깨는 스노우보드를 타기에 좋을 만큼 말려 있고 경사졌다. 안마를 받으며 엄마가 비명을 질렀다.


  “아! 너무 아픈데요!”

  “많이 뭉치셨는데요. 여태 안 아프셨어요?”

  “아이고... 아이고...”


  그런 엄마를 보며 웃음이 나서 킥킥대려 했지만, 등이며 허리에 가해지는 무자비한 안마 공격으로 인해 차마 웃지는 못했다. 엄마는 아파했고 동시에 시원해했다. 안마가 끝나고 가게를 나오며 말했다.


  “딸 덕분에 안마를 다 받아보네!”


  제주도 여행을 인솔하는 내 기를 살려주기 위해 잔뜩 꾸며진 말이었다.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음날에는 삼무공원을 비롯해 꽃이 만발하여 엄마가 좋아할 것 같은 장소 위주로 방문했다. 엄마는 카메라를 켜고 흔들린 사진들을 연신 남겼다. 사진을 찍는 특유의 포즈가 있었다. 손을 갖다대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휴대폰을 두 손가락만으로 지지하고, 재빠르게 촬영 버튼을 누르는 식이었다. 그러면 사진이 거의 다 흔들린 채 갤러리에 남았다. 엄마는 그래도 좋다고 히죽이며 웃었다.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마음에 한 가지만 떠오르면 분명할 텐데, 그렇지 못했다.


  어릴적, 내게 있어서 엄마는 방관자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일 것이다. 아빠가 거나하게 취한 채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면 그녀는 잠자코 누워 있었다. 내게는 절대 문을 열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문은 곧 부서질 것처럼 연약해 보였고, 아빠는 괴성을 질렀다. 무서워서 울음이 터진 내겐 선택지랄 게 없었다. 해코지할 것이 두려워서 늘 문을 열었다.


  문을 연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아빠는 내가 아닌 엄마를 찾았고, 엄마는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아빠가 엄마를 흔들어 깨우면 엄마는 그를 밀쳤다. 그러면 아빠는 괴성을 질렀다. 서로 무력을 쓰며 구차해지는 사이, 나는 아빠의 무릎께에 매달리며 제발 그만하라고 울었다. 내가 겨우 아빠를 떼놓고 안방으로 데려가 달래면 이번에는 엄마가 욕을 내지르며 아빠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다시 시작이었다. 그렇게 새벽의 진흙탕은 내가 중학교에 올라갔을 때까지 반복되었다.


  한 번은 문이 부서질까 걱정하며 서 있다가, 자는 척 하는 엄마에게 아빠를 신고하자고 말했다. 엄만 딱 잘라 대꾸했다.


  “안 돼.”


  나는 크게 충격받았다. 그러면 엄마는 내가 이렇게 괴로운 게 괜찮은 거야? 나는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은데. 할 말이 넘쳐났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신고하자며 엄마를 계속 조르는 일이었다. 그때 다시 한 번 굉음이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문을 발로 차면 그런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 1, 2를 눌렀다. 경찰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이 터져나왔다.


  아빠는 연행된 이후로 술을 먹고 찾아오지 않았다. 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아프기 시작했다. 한밤에는 초인종 소리가 들린 것만 같은 환청을 듣고 땀에 흠뻑 젖어서 깼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마음이 텅 빈 것 같은 만성적인 공허감이 찾아왔다. 주기적으로 우울해지기도 했다. 그러면 꼼짝없이 그 시기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겪은 일을 말로 다하기에 나는 아직 어렸다.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내게 있었던 일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 사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에게 사과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돌아오는 건 무시였다.


  “그때 네가 문 열어줬잖아. 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


  엄마의 말이 아직 선연하다.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는 매서운 목소리. 나는 슬퍼하지 않는 법도, 화내지 않는 법도 몰랐기 때문에 슬퍼하고 화를 냈다. 세상에 나만 외따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나는 무럭무럭 자랐다. 대학생이 되고, 또 졸업을 해서 혼자 밥벌이를 할 만큼 말이다. 그러는 사이 내 마음에도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나의 아픔에 몰두하는 것에서 벗어나 타인의 아픔에 관심을 가질 만큼의 여유였다. 그런 시기에 엄마와 제주도 여행을 가게 된 것이었다.


  실은 제주도에 있는 내내 즐기지 못했다.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해야 할 것 같은 무언의 압박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아물지 못한 상처가 엄마를 볼 때마다 건드려졌다. 그녀는 왜 사과하지 않는 걸까. 이 여행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다 여행이 끝날 때쯤 마음이 차분히 정리되었다. 똘똘 뭉친 엄마의 어깨처럼, 엄마도 나름의 견딤이 있지 않았을까. 내겐 방관자이지만 엄마 또한 피해자가 아니었을까.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엄마는 호기심 어린 눈길로 창밖을 구경했다. 여행이라는 것이 그녀에게 너무나 생소한 단어인 나머지 그랬으리라. 그런 엄마가 사과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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