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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은경 Jun 04. 2024

신재섭의『시옷생각』

시옷이 들어간 말에는 바람이 스치는 것 같아


시 시 시작을 외치며 시옷시옷      



  사과나무집 딸이 상처 난 것, 한자리에 머문 것들을 보듬어 시집을 지어 살게 했다. 시인이 오랜 시간 문을 내어 걸어간 자리를 따라가 본다. 그의 걸음은 웃음꼬리를 잡으러 다녔고 비어있는 책에 보라색 나무를 심었고  자귀나무 밑에서 속닥 요정을 기다렸다. 그리고 풍선껌을 불며 다시 태어날 대상들을 찾아 다녔다. 때론 잃어버린 시간에 오래 머물기도 했다.           



       

헝겊 물고기



눈 뜨거라 아가야

동그란 단추 눈

달아 줄게     


한 땀 한 땀 이어

새 옷 지어 줄게

젖은 옷 갈아입자 아가야


보송보송한 솜 넣어 주마

포근히 지내야 한다     


마음 끝 손끝으로 낳은

엄마의 알록달록한 헝겊 물고기     


길을 내어 간다

길을 물고 간다     

 

*4.16 공방에서 유가족 어머니들이 만든 열쇠고리      

 


 엄마들이 동그랗게 앉아 바느질을 하면 창문으로 빛이 들어온다. 한 땀 한 땀 뜰 때마다 빛도 엄마들의 손등 위에 내려앉는다. 엄마들이 지은 옷 속으로 빛이 들어가 더 따뜻해진다. 보송보송한 따스한 옷을 입은 아이들은 차디찬 바다에서 길을 내어 갈 수 있을 거다.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아이들의 마음에도 가 닿기를 바란다. 이미 닿아서 하늘로 별로 바람으로 꽃으로 새의 울음으로 우리 곁으로 길을 물고 다시 왔을 수도 있다. 

  시인이 담담하게 호명한 만 스물이 안 된 독립 운동가들의 이름이 나열된 <깃대>도  그가 마음을 둔 자리이다. 그의 연대는 요란하지 않고 조용하다. 물고기에게 한 땀 한 땀 솜을 넣어서 옷을 지어 입히고 , 신문 구석에 잠자던 이름들을 불러주어 시의 집에 살게 하는 일은 그가 연대하는 지극한 방법이다.     

  

시인의 시간을 따라가는 일은 바람 부는 11월의 어느 저녁 같아서  내 발걸음은 주춤댄다. 아빠를 그리워하며 말을 되감는 아이 옆에 나도 같이 앉아 눈을 감아본다.(「말 되감기」) 그리움을 넘는 아홉 고개도 같이 넘어 보고(「아홉 고개」) 엄마의 마지막 사진을 잃어버리기 전에 먼저 버림으로 엄마의 부재를 자기 통제 속에 두게 된 아이 옆에는 더 오래 같이 있어 준다. (「잃어버리지 않게」) 단짝으로 붙어 있다가도  흉터 없이 사르륵 떨어질 줄 아는 아이에겐 살짝 윙크를 날려 준다. (「포스트잇」) 시인이 부재의 시간을 서성거리다 자연스럽게 안녕을 하고 시작하는 새로운 시간에는 명랑함이 가득해서 하하 웃게 된다. 친구들이 붕붕 날아다니는 수련회에선 같이 날아다니고(「붕붕 드링크」) 똥꼬도 까마냐고 물어보는 아이에겐 “아니야 분홍빛일 거야”라고 살짝 알려준다.(「염소야, 뭐 하니?」) 냄새가 좀 나면 어떠랴 축구공을 같이 차고 (「냄새나는 우정」) 나뭇가지 하나 들고 친구들 잡기 놀이에 기꺼이 함께 한다. (「웃음 꼬리」) 자전거를 타고 빗속을 달려 초록 들판으로 따라가 본다.               




비와 자전거와 나



빗방울이 떨어진다

내 몸에 꼭꼭 닫아 둔

수만 개의 창을 열고서

비 맞으러 간다

자전거를 몰고 운동장을 지나

모퉁이를 돌아서     

초록

들판으로

빗방울 흠뻑 맞으며 달린다     


나는야,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 한 마리 



  <비와 자전거와 나>는 비 오는 날 온몸으로 비를 맞던 어린 시간으로 훌쩍 데려간다. 하교 때 비가 갑자기 온다고 해서 부모님들이 우산을 갖고 교문에서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신작로를  달려 집으로 갔다. 비를 맞아도 아이들은 신이 났다. 해방감 같은 걸 느껴서일까? 이 세상에 두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달렸다. 이 시에 나오는 아이는 우연히 비를 맞은 게 아니라 아예 작정하고 비를 맞으러 나간다. 그것도 자전거를 타고 말이다. 앞바퀴는 빗물을 가르고 뒷바퀴는 빗물을 감아올리면서 빗속 세상으로 나간다. 친구들끼리도 좋겠지만 혼자여야 더 자유로운 물고기가 된다. 요즘 아이들도 마음의 모든 창을 열고 바다로 나가 물고기가 되어보면 좋겠다. 맨발로 빗물 웅덩이를 찰방찰방 걸어도 보고...... 언젠가 걸을 세계에 힘이 되지 않을까. 빗소리를 들으며 시옷시옷 걷는 것도 좋겠다.     



시옷 생각     



옷, 깃발, 햇살, 날갯짓, 빗방울......     


시옷이 들어간 말에는 바람이 스치는 것 같아

내 머릿결 쓸어 주는 엄마의 손가락빗처럼     


갈라진 시옷에 바람이 일렁여서 좋아

샛강에서 소소소 바람 불어올 때처럼     


빗소리 들으며 집으로 가는 길

내 다리도 시옷이 되지      



 자음을 살펴보면 ㄱ부터 ㅂ까지는 모두 각진 모양이다. 비로소 ㅅ에 이르러서야 긴장이 풀어진다. 비스듬히 누워서 공간을 가른다. 그래서 ㅅ은 공간을 넘나드는 바람과  잘 어울린다. 시옷이라고 소리를 내보면 입이 바람을 만든다. ㅅ을 가진 말들이 일렁이는 바람을 겨드랑이에 끼고 언제까지라고 걷는다. 이런 ㅅ의 걸음은 전혀 다른 세계를 연결한다. 비와 소리를 함께 살게 하고 연두와 빛을 예쁘게 붙여 놓는다. 성질이 다른 두 단어를 받치고 서 있는 시옷은 듬직하다. 그러니까 ㅅ이 하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의 모양은 많이도 닮았다. 단어를 딱 붙여 살게 해서 또 다른 세계를 만들고 같이 걷게 한다.   

  

얼마 전에  <신재섭의 동시 북토크>에 다녀온 적이 있다. 동시는 응원이고 사랑이라며 그는 말문을 열었다. 애정을 갖고 자세히, 유심히, 오랫동안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동시를 잘 쓰는 방법이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애정의 시간만큼  틈이 생기고 그 틈 안에서 상상을 통해 시를 탄생시킨다는 그의 시를 모인 사람 모두 낭송했다.  또랑또랑 시를 낭송해준 아이들 독자부터 <비와 자전거와 나>에 나오는 비를 햇살로 바꾸어 멋지게 낭송해준 어른 독자까지 모두 멋졌다. 그들의 ㅅ은 무엇을 연대하고 무엇을 연결하고 어떤 몸짓으로 바람을 불러 놀지 궁금하다..     

  

신재섭 시인의 동시집에는 어린아이 혓바닥 같은 (「새싹」)이 뾰록뾰록 솟아나 살고 있다. 연둣빛 어린 싹이 세상 모든 맛을 맛보며 시 시 시작을 외치며 씩씩하게 잘 걸어가기를 바란다. 시인에겐 엄마가 쓸어주는 다정한 손가락빗이 있었다. 바람과 빗소리를 불러 언제까지라도 새로운 세상을 시옷시옷 걷게 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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