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5
올바른 글씨에 대해 처음 생각한 것은 대학시절입니다. 인생 처음으로 백지를 가득 채우는 서술형 시험을 치렀습니다. 연필과 지우개를 준비하지 못해 펜으로 삐뚤빼뚤한 답안을 채웠고 긴장한 탓에 손에는 땀이 흥건했습니다. 시험이 다 끝날 때쯤 눈앞에는 지저분한 낙서장이 있었습니다. 엉망진창 읽히지 않는 시험지는 큰 충격이었고 한 학기 동안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제출 후 돌아서는 순간까지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글을 보며 교수님이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생각만해도 아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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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일기를 다시 읽을 때도 비슷한 기분입니다. 펼쳐본 일기장 글들은 읽는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휘갈긴 글은 보는 것 만으로 마음이 급해집니다. 일기의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암호화된 글씨를 해석하기 바쁩니다. 다시 옮겨 적거나 컴퓨터로 타이핑 후 프린트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악필로 살아온 세월의 기록은 기억하고 싶어도 떠올리기 힘든 날이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때쯤 서점에 들러 악필교정 책을 샀습니다. 꺼내 볼 일기를 제대로 남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더는 글씨로 부끄러워지는 순간을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꾸준히 글씨를 연마했고 그해 8월 자필로 어머니의 생신 편지를 써드렸습니다. 달라진 글씨 앞에서 어머니는 묵혀 둔 고민이 해결되었다며 기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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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를 두드리는 일이 편하고 언제든 꺼낼 수 있는 휴대폰 메모장을 애용합니다. 하지만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거나 문제의 실마리를 찾을 땐 여전히 백지 앞에서 펜을 잡습니다. 공들여 쓴 글만큼 나의 생각을 정확히 배치하고 체득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머리에서부터 손끝으로 전류가 튈 때면 몸 전체에 시동이 걸립니다. 그 뚜렷한 순간은 나를 계획의 끝으로 데려가는 강력한 동력으로 작용합니다. 시간이 지나 종종 썼던 글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한눈에 잘 정리한 내용은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처럼 명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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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글씨라는 창조물이 정서를 담는 그릇임을 알고 있습니다. 정직한 글의 모양새는 보는 것 만으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직장인이 된 후에도 정성 들여 쓴 글은 꽤 유용한 무기입니다. 결재를 받을 때 첨언한 자필 글씨는 상대를 집중시키고 마음을 전달합니다. 설명이 막히는 순간 적어 놓은 글을 읽는 것 만으로 설득을 해내기도 합니다. 글씨를 잘 쓴다는 것은 결국 마주할 타인과 나에 대한 배려입니다. 쓰는 순간을 허비하지 않길 바랍니다. 남겨지는 문장들을 책임지고 싶습니다. 필적은 뇌의 지문이라는 말이 있듯이 종이에 찍힐 나의 지문이 오래도록 명백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