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스위스 베른 편
일어나자마자 창을 열어 하늘을 살폈으나 기적은 없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스위스 전 지역의 비 소식이었다. 구름에 덮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리기산의 풍경을 상상했다. 이내 거대한 구름에 통째로 덮인 스위스의 모습도 연상되었다. 15일의 유럽여행 중 단 하루의 자연여행이라 비가 내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리기산 눈썰매를 위해 스키 바지, 스패츠, 장갑, 티켓 할인권까지 준비해 온 터였다.
비를 피해 베른으로
베른을 택한 이유는 시내 상점가에 비가 와도 피할 수 있는 아케이드가 있기 때문이었다. 역 주변 상점가의 아케이드를 걸을 땐 그나마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 하루 종일 상점가만 구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사실 우리가 베른을 택한 가장 큰 이유는 박물관의 도시라고 할 만큼 다양한 박물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런던과 파리에서 다녀온 자연사박물관도 이곳에 있었다. 물론 자연사 박물관의 존재가 눈썰매를 대신할 수 있을 만큼 기쁜 일은 아니었지만 종일 계속되는 비를 생각하면 최고의 선택이라 생각했다. 전날 밤 차선책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였다. 베른 시 외곽 장미공원(RosenGarten)에서 구 시가 풍경도 감상하기로 했다.
어느 누구도 별을 볼 수 없는 몽골의 밤하늘이나 반영을 볼 수 없는 우유니 호수를 상상하고 떠나지는 않지만 계획한 대로만 경험하고 오는 여행을 최고의 여행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니 어쨌든 기운을 내서 베른행 기차에 올라탔다. 다행히 유레일 글로벌 패스를 가지고 있어 스위스 기차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다.
베른에 도착하기 전 날씨에 대한 기대를 조금은 했지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빗방울은 더 두꺼워져 우산을 꺼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베른 버스 타기
먼저 마을 외곽에 위치한 장미공원에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비도 오고 우버도 없으니 버스를 선택했다. 스위스는 물가가 비싸다.(베른 역에서 장미공원까지 짧은 구간 이용료가 2.6프랑이니 대략 3,000원이 넘는다. 스위스 패스를 소지했다면 버스를 비롯해 유람선, 박물관까지 이용할 수 있었겠지만 우리 여행에는 효율적이지 않았다.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구시가의 풍경은 명불허전 아름다웠다. 따듯한 빛깔의 지붕과 뾰족한 첨탑, 굽이도는 베른 강.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베른의 구시가 풍경은 홍콩이나 상하이에서 마천루를 바라보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장르의 푸근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공원 옆 풍경이 보이는 음식점에는 비를 피해 풍경을 감상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식사를 마치고 언덕을 걸어 내려가 구시가를 천천히 산책하며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비가 더 심해져서 버스를 타고 처음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연극에서 막과 장이 바뀌면서 무대장치가 달라지듯 몇 시간 전 떠나올 때 와 전혀 다른 풍경이어서 버스에서 잘 못 내린 게아닌가 몇 번이고 주변을 고쳐 둘러봐야 했다. 조용하고 무뚝뚝하던 거리는 사라지고 마치 파리나 이탈리아의 광장처럼 복잡함과 소란스러움이 골목골목을 채우고 있었다. 인파를 따라 구시가 깊숙이 들어가니 그곳에는 단 하루 베른 여행 반전의 드라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잠을 자는 곰을 깨우는 베른 카니발
스위스 3대 카니발이라고 하는 베른의 축제는 2월 말 마을의 상징인 곰을 시끌벅적한 악기와 퍼레이드로 겨울잠을 깨우는 의식이다. 다양한 코스프레와 가면을 쓰고 나팔과 드럼을 연주하며 긴 구시가지를 퍼레이드 한다. 베른의 구시가는 단지 걷기만해도 아름다운 건물과 아름다운 분수대가 있어 마치 놀이공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카니발은 여러 날 동안 다양한 콘셉트로 진행되는데 우리가 만난 것은 어린이를 위한 카니발이었다.
아이들은 알록달록한 분장을 하고 조각조각 잘라 온 색종이를 사람들에게 뿌렸다. 흩날리는 종이 조각이 비에 젖은 바닥을 채도 높은 수채화 캔버스로 만들었다. 축제를 즐기는 그들의 미소를 맞으며 우리는 날씨도 잊어버렸다.
“즐거운 여행은 날씨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축제 후 베른 자연사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베른 자연사 박물관은 앞서 런던, 파리의 거대한 규모와는 달리 소박한 느낌이었습니다. 런던과 파리가 지구 전체를 테마로 한다면 베른 자연사 박물관은 로컬 생태를 보여주었는데 규모의 아담함과 달리 디자인 강국 다운 전시 데코레이션이 아기자기함을 더했습니다.
주변에 다양한 박물관이 있으니 시간과 관심 있다면 천천히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축제에 많은 시간을 보내 자연사 박물관 하나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오가는 길 곰의 도시 베른답게 여기저기 곰의 상징물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산책의 소소한 즐거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해 질 녘까지 베른 시내를 구경하고 다시 루체른행 기차를 탔습니다.
베른에서 루체른까지는 1시간 정도의 거리입니다. 겨울여행이라 해 길이가 짧아져 루체른에 도착하니 이미 컴컴한 밤이었습니다. 낮이 짧은 것은 아쉽지만 아름다운 야경을 오래 감상할 수 있으니 좋은 점도 있죠.
지름길을 버리고 카펠교를 건너 텅 빈 거리를 산책합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세트장처럼 인적 없는 거리를 누비며 뮤지컬 영화처럼 뛰고 놀며 호텔을 향했습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베른에서 품어온 축제의 기운이 우리를 즐겁게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슬픈 표정의 사자와 작별 인사를 남기고 루체른을 떠납니다.
비가 왔지만 평생 기억에 남을 추억을 안고 떠납니다. 그리고 스위스를 반환점으로 우리 여행은 후반으로 들어섭니다.
이제 남은 나라는 이탈리아뿐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다 더 많은 도시(밀라노 - 베네치아 - 피렌체 - 로마)를 경험 합니다.
11살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