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아비뇽
아비뇽 구교황청은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생각보다 넓었다. 가볍게 돌아보려던 계획이 조금 틀어졌다. 이탈리아 교황청에 비할 바는 아니어도 교황이 머무른 공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해가 짧아지는 시기가 되어 그런지 낮의 여유가 없었다. 교황청 건물 내부를 모두 둘러보고 생베네제 다리에 들렀다가 아비뇽 구시가 골목에서 시간을 보내려면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았다. 그리고 저녁엔 론강에서 일몰을 볼 계획까지 세웠으니 느긋한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아비뇽에서는 무리한 일정에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게실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뽑아 서둘러 마시려다가 멈칫 했다. 모퉁이에 놓인 무심한 나무벤치가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커피 한잔 여유있게 마시지 못할만큼 급한 일이 있는 것인가? 오늘 못보면 언젠가 다시 오면 될 것이고, 어차피 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게 많은데 삶이고 세상인데 말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조급해 했을 방금 전의 내 모습이 쑥스럽고 부끄럽다.
시간이 잠든 것 같은 중세도시 아비뇽의 골목길은 종일 걸어다녀도 지치지 않을 만큼 보석 같은 도시였다. 왼쪽 발목이 뻐근하게 아프고 나서야 교황청을 나온 이후 한 번도 앉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오전에 되새긴 여유를 잊은 것은 아니지만 아비뇽의 골목은 기대 이상이었다. 골목 여행이라면 귀가 솔깃해지는 사람들에게 아비뇽은 분명 최고의 도시일 것이다.
회전목마가 보이는 광장의 뒷골목이 궁금했지만 아쉬움을 달래며 광장 카페에 자리를 잡고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의자에 앉아 커피를 앞에 두니 광장의 소음과 찬 바람이 훅 끼쳐 들어왔다. 활기가 넘치는 여행의 소리가 시끌시끌 섞여 있었다. 재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찬찬히 커피를 마셨다.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붉은 태양의 기운과 별처럼 떠오른 론강의 가로등, 은하수처럼 흐르는 바람이 아마도 강변에는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낮에 본 생베네제 다리는 그곳에서 도시를 빛내는 주인공이 되어 서 있을 것을 생각하니 연인과의 데이트를 기다리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아비뇽의 야경을 볼 수 있는 호스텔을 예약한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론강과 교황청이 건너다보이는 언덕에 있어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너무나 훌륭했다.
이 아름답고 황홀한 순간에 왜 슬픈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대상에 대한 내 사랑은 지나고 보면 언제나 나 혼자만의 것이 많았다. 상대에게 끌려 애틋해지고, 그리워지고, 항상 보고 싶어지면, 그게 사랑이라 생각했다. 그리고는 그 사랑이 영원하기를 성급하게 꿈꿨다. 내 모든 시간을 그 사랑에 기꺼이 맞추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언제나 나 홀로 낯선 곳에서 찬바람을 맞고 서 있었다. 이미 늦었는데도 얼굴과 가슴에 몰아친 흙바람을 사랑을 위한 시련이라 여기며 미련하게 견디며 더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리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온몸이 모래에 파묻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가 되어서야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난 단 한 번도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결실은 맺은 사랑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기에 혼자만 영원한 사랑이라 믿고 애태웠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어도 사랑은 온전히 아름답다. 다시 사랑이라는 그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겁고 설레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