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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미 Dec 23. 2019

미술은 좋아하는데 서양 현대미술은 잘 모르겠어

#세계를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의 서양 현대미술

 중세 시대의 미술은 유일신을 위해 존재하였고 천년의 시간이 흐른 뒤 시작된 르네상스 시기에는 고전 문화의 부활이라는 가치 아래, 신이라는 존재를 벗어난 인간을 자유롭게 탐구하는 것이 미술의 역할이었다. 이처럼 미술은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이 서 있는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반영한다.


 폴 세잔, 폴 고갱 그리고 반 고흐는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들로 외부세계의 재현이라는 미술의 종속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20세기 현대미술을 견인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물체를 기하학적인 본질에 대해 연구한 세잔은 입체주의 아버지로, 원색의 종합적인 사용을 통해 색의 상징적 효과를 추구한 고갱은 야수주의, 그리고 강렬한 터치로 격정적인 생명감을 표현한 고흐는 표현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현대미술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는 조르주 브라쿠(Georges Braque)와 함께 입체주의를 창시하였다. 이들은 캔버스에서 불변의 영역으로 여겨져 왔던 단일 시점과 원근법 대신에 다시점으로 화면을 구현하는 혁신성을 선보였다. 입체 주의자들은 세잔의 새로운 시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세잔의 태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상을 분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었다.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907 / pin.it/kcdqj5nfrlbkit

 피카소의 대작인 <아비뇽의 처녀들>은 미학적으로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다시점으로 작품을 표현하여 시간이 흐름이 이 안에 포함되어 있다. 하나의 본질을 보려면 다각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상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입체파 화가들이 표현하는 방법이다.


 야수주의는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 앙드레 드랭(Andre Derain) 등 작가들의 작품으로 1905년에 열린 살롱 도톤느(Salon d'Automne)와 1906년에 진행된 앙데팡당(Independant) 전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이성과 합리성을 중요시했던 입체 주의자들과는 달리 야수 주의자들은 색채의 상징성을 주장했던 고갱의 영향 아래, 화가의 주관과 감성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며 순도 높은 강렬한 색을 통한 회화의 장식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앙리 마티스, <마티스의 부인/ 녹색의 띠> 1905 / www.pauloeuvreart.com

 당시 앙리 마티스 <마티스의 부인/녹색의 띠>는 '이상하다'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마티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부인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린 것이다."

  20세기 근간을 이루는 혁신적인 발언이었다. 묘사하고 재현한 것이 아니라 물감으로 칠한 평면의 작품을 그림이라고 칭한 것이다. 미적인 기준이 화가가 느낀 바를 색채로 표현한 것임을 미술 혁명의 포문을 여는 발언이었다.

 현대미술의 시작은 야수주의에서부터 라고 말할 수 있다.


 1905년경 야수주의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독일에서 등장한 표현주의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기반으로 당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느끼는 심리를 강렬하게 표출했다. 격정적인 내면의 감정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고흐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표현주의는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에리히 헤켈(Erich heckel), 막스 페히슈타인(Max pechstrin) 등으로 이루어진 다리파,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와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에 결성된 청기사파, 그리고 오토 딕스(Otto Dix), 게오르게 그로스(George Grosz) 등으로 구성된 식객관성 그룹으로 나누어 설명된다.


  청기사파의 일원이었던 칸딘스키는 러시아 신지학의 영향을 받아 훌륭한 예술은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내적 필연성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구상이 아닌 추상 화면을 구성한다. 추상은 서정 추상과 기하학적 추상으로 설명되는데, 칸딘스키가 구현하는 서정 추상은 내적인 정서를 표출하기 위한 예술가의 직관을 중요시한다.

 칸딘스키가 영향을 받은 종교 운동인 신지학은 신의 본질을 찾아내기 위한 종교이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훌륭한 예술은 정신적인 것, 일종의 추상적인 것이 예술이다." 

 칸딘스키는 일종의 철학자 같은 예술가였다.


칸딘스키 <구성 Ⅵ>, 1913 / www.reproduction-gallery.com

 물감의 교향곡이라고 불리는 칸딘스키의 <구성> 시리즈 중 한 작품이다. 어떠한 대상을 보고 그에 대한 작가의 느낌이 어떠한가를 그림에 녹여낸다. 그림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림은 있는 그대로를 느끼면 된다. 감정적인 울림만을 느끼면 된다는 그의 그림에서 직관적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으로 대표되는 기하학적 추상은 논리와 이성을 강조하는 태도를 취하며 정신적인 것보다는 보편적인 조형성을 강조한다. 초기 추상의 기하학적 계열을 이루는 작가들 중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작가로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를 들 수 있는데, 말레비치는 그가 주창한 절대주의를 통해 자연의 모방이 아닌 정신의 절대성을 지향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동시대를 살며 각기 다른 추상의 화면을 보여준 칸딘스키와 몬드리안, 말레비치의 화면을 비교하면 작가 개개인이 세상을 이해하는 독창적인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피에트 몬드리안 <구성 No.10, 부두와 바다>, 1915 / www.reproduction-gallery.com

 몬드리안은 차가운 추상, 기하학적 추상이라 불리며 신지학의 관심과 영향을 받았다. 우주의 보편적인 음과 양으로 상생하며 우주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방식에 대한 영향을 받았고 수직과 수평의 질서와의 조화를 찾아내었다. 삼원색과 삼무색으로 추상화를 그리고 보다 기하학적이고 평면적이며 계산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 <흰색 위의 흰색(White on White)>, 1918 / www.reproduction-gallery.com

 말레비치는 완전히 현실로부터 벗어났다. 러시아의 신비주의 종교에 영향을 받아 그의 그림 또한 신비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정신성의 상태를 지향하고 비대상(오브제)이 없는 상태를 그렸다. 정신성,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상태를 단순하게 표현하였다. 빛과 신을 동일시 하였다. 

 작품 <흰색 위의 흰색>은 어떠한 것도 제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추월적 존재의 모한함을 최소한의 색과 형태로 나타내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것을 그리는 것.

"말레비치의 추상은 추상 그 자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많은 예술가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유럽의 전통적 가치관에 회의를 갖게 되었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기존의 논리와 의미에 도전하는 다다 운동이 촉발되었다. 다다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로 국제 주의를 표방하며 취리히와 베를린, 하노버, 뉴욕, 파리 등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였는데, 각기 다른 상황을 가진 지역의 특수성과 연관되며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중 다다 발생에 있어 핵심적인 도시는 취리히로, 중립국이었던 스위스에 전쟁을 혐오하던 이들이 징집을 피해 모여들었고 특히 취리히에 각국의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전쟁을 일으킨 인간의 오만함과 그동안 진리로 받아들여졌던 가치들에 대해 비판하고 토론하는 장소가 마련되었다. 예술가들은 카바레 볼테르에 모여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고 시를 낭독하는 전위적인 퍼포먼스를 벌이며 '반예술'이라 불리는 새로운 예술의 태동을 일으켰다. 반예술이란 전통적인 예술 관습을 깨부수는 지향점으로 기존의 관습적인 예술 관념을 부정하기 위해 유일성과 거리가 먼 기계 생산물이나 보잘것없는 쓰레기 등을 작품의 재료로 사용했으며 제작 과정에 있어서도 우연성이나 즉흥성과 같이 비전통적인 방식을 선보였다. 모든 것을 부정하겠다. "부정의 정신이 핵심"이다.

 또한,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것이 다다의 대표적인 '음성 시'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전의 의미 있는 것들을 모두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퍼포먼스였다. 아무 이유 없이 만들어진 단어 DADA에서 따온 우연성으로, 우연의 법칙에 의존하였다. 정성스러운 손에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라 우연의 법칙에 따라 배치하였다.

카바레 볼테르에서 다다 음성 시를 읽고 있는 후코 발, 1916 / udc.es


 

 취리히 다다가 다소 개념적이라면, 전쟁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독일 베를린의 다다이스트들은 보다 정치적인 성향을 띤다. 라울 하우스만(Raoul Hausmann), 한나 회흐(Hannah Hoch),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와 같은 작가들은 사진을 콜라주 하는 포토몽타주 기법을 통해 충격적인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전통적인 개념의 예술을 파기하는 동시에 전쟁을 일으킨 파시즘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지리적으로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뉴욕에서는 기계문명과 물질적인 풍요를 기반으로 독특한 양상의 다다 운동이 진행되었다. 전쟁을 피해 뉴욕으로 망명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은 프랑스에서 병걸이나 자전거 바퀴를 활용하여 일회적으로 시도했던 레디메이드 미학을 뉴욕 다다의 핵심 미학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남성용 소변기에 예술작품의 지위를 부여한 뒤샹의 <샘>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미학적 질문을 던지기 위한 도전적인 제스처로서 현대미술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마르쉘 뒤샹 <샘>, 1917 / www.docsity.com

 기존의 논리와 질서에 대항했던 다다이스트들의 가장 큰 목적은 전쟁이라는 비극적 상황을 불러일으킨, 이전에는 옳다고 믿어졌던 전통적 가치를 철저히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부정해야 했던 다다이스트들은 본질적으로는 다다마 저도 부정해야 했기 때문에 결국 진정한 다다이스트란 자기 자신마저도 소멸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필연적인 자기 소멸을 희망적인 방향으로 보완한 것이 초현실주의이며, 초현실주의자들은 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부정했던 다다이스트들과는 달리 초현실을 통해 세계를 구원하고자 하였다. 1924년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의 「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을 통해 촉발된 초현실주의는 순수한 정신의 자동 현상으로 설명되는 오토마티즘 방식으로 무의식 속에 숨겨져 있는 인간의 정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앙드레 마송(Andre Masson),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등의 초현실주의자들은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정신 분석 이론을 탐구하며 자동기술적 드로잉, 편집광적 비평 방법, 데페이즈망과 같은 인간의 무의식을 해방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을 선보였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대부분의 초현실주의자들이 망명길에 올랐는데, 그중 마송은 종전 후에 본국으로 돌아갔던 대다수의 유럽 미술가들과는 달리 뉴욕에 남아 초현실주의의 미학과 홀리기 기법 등을 전수하며 추상표현주의 형성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앙드레 마송 <Automatic Drawing>,1924 / artclasscurator.com

 앙드레 마송은 '이성의 통제 없이 흘린다, 나의 무의식을 드러낸다'는 이념으로 작품을 만들어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는 다시 미국으로 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신 본국으로 돌아간 경우가 많은데 앙드레 마송과 몇몇은 뉴욕에 남아 계속해서 작업활동을 하였다.


 이전까지 유럽의 아방가르드 미술 경향을 따르던 미국의 미술은 1950년대 추상표현주의의 등장으로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추상표현주의에서는 작가의 직관적인 표현 행위를 통해 예술 작품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라 설명하는데, 특히 거대한 캔버스 위를 거닐며 자유롭게 물감을 흩뿌리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드리핑 기법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으로 양분화된 냉전 시대에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표상하는 전위적이고 독창적인 '액션'으로 신화화되었다.

잭슨 폴록 <Jack the dripper> / pin.it/nkaeepl6r26esn

 잭슨 폴록의 작업은 그냥 물감을 뿌리고 흩뜨리는 것이었다. 드리핑 "Jack the driper"라는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 이런 그가 미국적 작가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사회의 소멸과 미숙의 냉전 상태였던 당시 소련은 공산주의였고 미국은 자유주의를 허용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시대에 들어오면서 자유 민주주의 방식을 홍보하기 위한 아주 좋은 표현 방법이었다. 문화 대군으로서 그는 홍보하였다. 

 뿌리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였다. 일명 액션 페인팅이라고도 불리는데, 액션 자체가 리얼리티였고 작가 행위가 리얼리티였다. 

 그를 심플하게 말한다면, 네거티브, 스토리, 일루전을 찾을 수 없는 작품이다.


 당대 뉴욕에서 형식주의 모더니즘을 이끈 이론가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1960년 발표한 「모더니스트 회화」를 통해 모더니즘 회화의 대표적인 특성을 '평면성'으로 규정,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3차원의 공간을 재현하는 것을 포기한 폴록의 하면은 모더니즘 회화의 전형으로 평가되었다. 이후, 폴록의 화면에서 구상적 이미지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그린버그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와 바넷 뉴먼(Barnett Newman)과 같은, 추상표현주의의 또 다른 계열로 볼 수 있는 색면추상 화가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색면추상 작가들은 액션 페인팅 작가들처럼 어떤 행위를 통해 유일무이한 흔적을 남기는 데 치중하지 않고, 고도의 정신성을 바탕으로 색면들을 나열하면서 거의 종교적 체험에 비견되는 비극적이고 영원한 주제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미술 이론가 그린버그 / seattleartistleague.com

 그린버그가 정의한 모던은 평면성과 순수함을 이루어내는 것이었다. 회화면 회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을 극대화하는 것이었고 3차원적인 것은 버려야 하였다. 회화가 순수하게 존재하려면 네거티브가 빠져야 하였다. 평면성을 확보하느냔, 확보하지 않느냐가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Jack the driper인 잭슨 폴록은 모던의 전형 그 자체였다.

추상주의가 미국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추상의 피로감을 느낀 젊은 작가들이 대중과 현실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팝아트의 시작이다. 소비 활성화를 위해 많은 양의 광고 이미지들이 대중들에게 쉴 새 없이 공급되었고, 이상적인 중산층의 삶에 대한 동경을 유도하는 다양한 전략들이 수행되었다. 소비사회의 이러한 대중문화적 속성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화면에 옮겨온 이들이 바로 팝아티스트 들이다.

 팝아트는 미국적 물질주의 문화의 반영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데, 시대를 반영하는 새로운 예술로서 팝아티스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앤디 워홀(Andy Warhol)이 활동한 뉴욕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대중적인'이라는 의미를 지닌 '팝'과 '순수예술'을 뜻하는 '아트'가 합성된 팝아트는 대중적 소재를 예술로 끌어들여 소비사회와 미술의 관계를 중성적으로 제시한다.

앤디 워홀 <메릴린 먼로>, 1967 / popularmakeup.bestnailideas.com

 앤디 워홀의 <메릴린 먼로>는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그렸다. 보다 기계적이고 인공적인 컬러로 비 자연스러움을 연출하였다. 

 "실제 존재하는 이미지는 허구다."

 진짜가 아니라 허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가 알고 있는 메릴린 먼로마저도 허상이며 이것은 단지 인쇄된 이미지일 뿐이다라는 것을 표현하였다.

 또한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인해 작품은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손쉽게 다량으로 복제할 수 있음을 대중매체는 시대가 지배하는 매스미디어의 질서임을 설명하였다. 작업실을 아뜰리에라고 부를 것이 아닌 팩토리(Factory)라고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형식주의 모더니즘을 이끌었던 그린버그에게 있어 팝아트는 진정한 문화를 천박하게 복제한 키치(Kitsch)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린버그가 모던의 전형이라 평가한 추상표현주의의 대안으로 찾은 이들이 바로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케네스 놀란드(Kenneth Noland)등의 하드 에지 작가들과 헬린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e)등의 색면 추상 경향을 보여주는 작가들이다. 

 그린버그가 '후기회화적 추상'으로 명명한 이들의 추상은 앞선 추상표현주의 작가들과는 달리 보다 기계적이고 차가우며 냉담한 이성을 강조한다. 후기회화적 추상 작가들은 완전한 평면성을 획득하기 위해 화면 안에서 최소한의 환영 효과까지도 배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시도의 극단에서 바로 미니멀리즘이 탄생하게 된다. 환영을 제거하려는 일련의 움직임들이 결국 예술의 사물성의 영역에 위치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화면에서 환영을 제거하려면 화면에 등장하는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관계를 해체시켜야 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한 극단적인 방법으로 미니멀리스트들은 작품을 부분과 부분으로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사물로 만들어버렸다. 

 후기회화적 추상은 '미니멀 회화' 또는 '하드에지'라고 불리었다.

프랭크 스텔라 <깃발을 드높이>, 1959 / pin.it/hnyu5qadiqkfyf

 프랭크 스텔라는 "당신이 보는 것 자체가 당신이 보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야수주의에서부터 온 회화의 자율성이 극단까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은 물감이 발라진 평면이라는 모던화 화면의 극치이며 극단주의라는 것, 수직과 수평의 자기 충적적인 모더니티를 강조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린버그와 마찬가지로 미술의 순수한 형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이론가 프리드(Michael Fried)의 '연극성'을 통해 개념을 찾았다. 프리드는 미니멀한 조각 작품을 물체화된 미술이라고 비난했다. 평면의 환영을 제거하기 위해 직접적인 사물로 제시된 오브제는 어떠한 순간에도 완전한 의미를 가진 채로 존재하는 순수예술과는 달리, 그것이 놓인 전시 환경,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관람자와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다시 말해 미니멀 작품은 그 자체로 완결된 실체가 아니라 관람자를 포함한 전체적 상황의 일부분이며, 관람객은 순간적으로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시간을 들여 주변 공간을 거닒으로써 현상학적으로 그것을 수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프리드는 마치 연극처럼 작품을 경험하게 되는 이러한 과정을 모더니즘의 순수성을 위반하는 것이라 비판한다. 하지만 형식주의 모더니스트들의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미니멀리즘 작가들은 보다 관람자의 체험을 중요시하는 경향으로 나아갔고 프리드가 부정적으로 제시한 연극성의 개념 역시 현대미술의 특성을 설명하는 용어로써 긍정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모더니즘에서 추구했던 순수 미술의 지속적이고 절대적인 가치가 점점 사라지면서 1960-70년대 이미 회화나 조각 등을 간단히 나눌 수 없는 다양한 경향의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앨런 캐프로의 행위미술, 크리스 버든과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신체 미술, 조셉 코수수와 존 발데사리의 개념미술, 로버트 스미스슨과 리차드 롱의 대지미술, 백남준과 빌 비올라의 비디오 아트, 마이클 애셔와 한스 하케의 제도 비판 미술 등이 속한다.

 

 특히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의 글 「왜 지금까지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에서 본격적으로 촉발된 1970년대의 여성주의 미술이 시작되었다. 여성주의 미술은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 관심을 기울이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성을 공유하며 절대가치만을 신봉했던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인류 역사를 기여한 그러나 잊혔던 여성 화가들을 찾아내었다. 제1세대 여성주의 미술가 주디 시카고의 <디너파티>는 여성의 신체적 특성을 강조한 방식으로 1970년대 페미니스트 예술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의 뒤를 잇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순수한 예술의 의도를 가지고 시선을 외부로 가져가게 한다. 여성, 흑인, 소수 인권 등 다양성 아래서 존중받기 시작한 시대가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과 함께 여성 미술가의 활기는 더욱 뜨거워지기 시작하였다.

주디 시카고 <디너파티>, 1974-1979 / 충청 타임스


참고 문헌: 경기도미술관

사진 출처: 사진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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