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노트북을 하고 있는데 카톡 알림이 떴다.
‘건율이’
동생의 이름 옆으로 빨간색 동그라미엔 3이라는 메시지 숫자가 보였다. 직장 동료이자 가족이며 동시에 친구인 나의 오라비. 동생과 나는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을 나눈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 속엔 격도, 시간의 구애도 없다. 별 대수롭지 않은 소소한 이야기부터 내밀하고 깊은 이야기까지. 대화의 주제는 다양했다.
‘내일 올 때 우유 사오셈’, ‘원두 다 떨어져 감’, ‘오늘 ooo책 나갔음’과 같은 일과 일상의 영역에서부터 ‘돈 좀 빌려줘. 생활비가 없음’, ‘요즘 피곤하다’, ‘그림 그리는 것 좀 쉬고 싶다’와 같은 감정적 변화와 슬럼프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전달하고 공유한다.
‘나 부산은행 청년작가 공모전 1차 됨’
‘1등 하면 상금도 큼’
‘작가노트 정리하는 것 좀 도와줄 수 있음?’
동생이 보낸 메시지 속에는 좋은 소식 하나와 조금 귀찮게 느껴지는 소식 하나가 포함되어 있었다. 동생은 또 언제 저런 공모전에 신청했던 걸까. 자기 앞의 길을 스스로 닦아 나가는 모습에 대견함을 느끼면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애잔함이 밀려왔다.
‘이거 하려면 작가 노트랑 포트폴리오 내야 하거든.’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정리가 잘 안 됨’
‘일단 작가 노트랑 작업 내용 준비해서 갈 테니까 누나는 내 얘기 듣고 어떤지 피드백만 좀 해줘’
동생은 종종 전시나 공모전, 지원사업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해야 할 때면 나를 찾았다. 그럼 나는 동생이 미리 써온 글을 매끄럽게 가다듬거나 맞춤법 오류를 찾아내며 글의 구성을 살펴봐주는 일을 한다. 가끔은 글로 정리하지 못한 무형의 것들, 가령 생각이나 떠오른 추상적인 이미지만을 가지고 대화를 나눌 때도 있었는데 이 경우엔 잘 듣기만 하면 된다. 동생이 가지고 온 생각을 잘 듣다 보면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단어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면 난 중첩되는 단어를 찾아 이야기해 주거나, 동생의 말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나올 때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고 말하는 게 다였다. 단순해 보이는 이 과정에서 동생은 무엇을 더하고 뺄지를 정하는 듯했다. 남겨진 메시지를 보아하니 이번에 해야 할 역할 역시 비슷한 종류의 것 같았다.
‘1차 합격 다 해놓고 내가 왜 필요하냐? 알아서 잘하면서’
나는 모니터 바깥으로 설핏 웃으며 조금은 귀찮다는 뉘앙스를 섞어 대답했다. 하지만 진심은 달랐다. 나는 동생과 나누는 이런 종류의 대화를 언제나 반가워했다.
우리는 이런 ‘의무적 대화’의 기회가 생기면 약속 장소를 우리가 좋아하는 단골 카페들 중 하라노 정했다. 그리곤 놀고(며) 먹기를 좋아하는 남매답게 커피와 샌드위치, 디저트 따위를 시켜놓고 두세 시간씩 수다를 떨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좋아하는 공간을 누리는 기쁨. 1차원 적인 만족감을 주는 시간. 그 모든 시간이 즐거움의 요인이었지만 본질적으로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는데 그건 바로 대화에서 발견하게 되는 동생의 내면. 그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무엇을 공유한다는 감각이었다.
나는 언제나 동생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해라는 말속에는 닮고 싶다는 마음이, 일종의 동경하는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 남매가 유년을 보낸 보호수는 5미터 정도의 성탑 위에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작은 언덕에 심겨있었던 보호수를 시간이 흐른 후 보존하기 위해 주변을 돌담의 형태로 만든 것 같다. 성탑이 꽤나 높았으므로 보호수를 중심으로 한 성탑 공터의 가장자리에는 철제 난간이 세워져 있었다. 당시 동생과 나를 포함한 어린이들은 오래된 보호수 나무를 중심으로 뛰거나 나무를 오르며 놀곤 했다. 아이들 가운데는 위험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자신의 용감함을 과시하는 아이들이 꼭 있었고, 그런 아이들은 성벽 난간 바깥으로 빠져나가 성벽의 둘레로 난 좁다란 길을 걸으며 자신의 용감함을 과시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확실히 위험한 구석이 있었지만, 조심하기만 한다면 그렇게 불안한 행동은 아니었다. 다만 안정을 안전으로 여기던 내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을 뿐. 호기심으로 충만했을 시기를 생각하면 특별한 일도 아니니까.
나와는 다르게 동생은 왕왕 용감한 친구들과 함께 성벽의 난간 밖에 머물거나 빠른 속도로 걷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난 동생을 향해 ‘어서 난간 안으로 들어오라’고, 위험하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쳤고 동생은 입을 삐죽이며 공터 안으로 슬며시 들어왔다.
같은 부모님, 같은 환경, 같은 밥을 먹고 자라도 서로의 삶은 다른 것이었다. 어릴 땐 우리가 비슷하다 여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주체적으로 하는 선택이 늘어날수록 우리가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내가 성벽 밖, 난간을 걷지 못하는 사람이듯, 동생은 궁금한 길은 반드시 제 발로 걸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아는 동생은 늘 과감했고 생명력이 넘쳤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이었으며 원하는 일을 이루는 일엔 집요한 면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성향은 당연하게도 동생이 그리는 그림에 가장 잘 나타났다.
주말 오후 두 시. 동생과 만나 커피를 마시며 공모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1등부터 4등까지 차등 주어지는 상금에 대하여, 이 공모전의 규모와 영향력에 관해서도 동생은 자세히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평소와 다른 말 하나를 덧붙였다.
“이거 꼭 돼야 된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면 진심이 아닌 적이 없었지만 가시적인 성과나 결과를 바라는 법이 없었던 동생이기에 그 말은 흘러가던 우리의 대화를 멈춰 세웠다.
“너답지 않게 왜 간절하고 난리? 되면 당연히 좋겠지만, 안되면 할 수 없는 거지. 안 그래?”
동생은 눈썹을 움직이지 않은 채, 눈을 바로 뜨며 말했다.
“이거 1등 상금이 이천만 원짜리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