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일 년 동안 동생과 나는 계간지의 형태로 네 권의 책을 만들어 세상에 내보냈다. 그 사이 동생을 비롯해 함께 책을 만들던 두 명의 친구들이 대학교를 졸업했고, 나는 사대보험을 보장해 주던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일 년은 짧지만 길었다. 무언가를 이루기엔 부족했지만 우리 사이에 크고 작은 변화를 만들어내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책의 수익금이 들어오던 통장엔 더 이상 정산금이 찍히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일신상의 변화를 핑계 삼아 책 만드는 일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매일 만나던 사이에서 가끔 만나 안부가 아닌 근황을 묻는 사이로, 각자 있었던 자리로 돌아갔다. 우리 중 누구도 서운해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작부터 이 모든 것이 한 때이며 그 시절로 지나온 후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삶에는 예측할 수 없는 지점이 존재했기에 여전히 남아있던 어떤 마음은 동생과 나를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내 손으로 책을 만들고 의미를 부여하던 기쁨. 인정의 감각은 동생과 내가 책방을 열도록 만들었다. 조금은 무모해 보이는 결정이었지만 대단한 결심 없이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건, 책을 만들던 시간과 끝을 예견하고 만났던 시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책방을 열기 위해 대형 서점과 유통 계약을 맺고 책을 사들였다. 책방 SNS계정으로 자신이 만든 독립출판물을 홍보하면서 입고를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나는 무람없이 입고를 승낙하곤 했다. 3권에서 많으면 5권. 권수는 작지만 꼼꼼하게 포장된 책을 받을 때면 과거 내가 두드렸던 문, 어느새 나는 그 문 안에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새삼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나보다 먼저 그 자리에 섰던 사람이.
정확하게 내가 먼저 국화언니에게 연락을 했는지, 아니면 언니가 책방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가게 문을 연지 4개월쯤 지났을 무렵, 국화언니가 책방에 들렀고, 언니와 내가 마주 앉아 한참 책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장면만이 떠오를 뿐이다.
오랜만에 만난 국화 언니는 더 이상 책방의 주인이 아니었다. 언니가 운영하던 작은 책방은 카페가 문을 닫으며 정리 수순을 밟았다. 그 사이 아기였던 언니의 딸은 어느덧 어린이집에 갈 만큼 자랐고 언니는 육아와 본업인 지역 방송국 보조 작가 일을 병행하고 있었다.
어린이 집으로 아이를 데리러 가기 전 들렀다는 국화 언니는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했다. 언니는 다정하고도 슬픈 눈으로 나의 작은 책방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리곤 ‘참 좋다’, ‘이렇게 될 것 같았다’는 말을 했다. 책방에 난 큰 통 창 옆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던 언니의 얼굴 위로 반쯤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초여름 햇빛이었는데도 언니가 앉은자리만큼은 이미 가을이 온 것만 같았다. 언니는 커피를 마시다 말고 내게 독서모임 계획은 없는지 물었다.
당시 책을 입고하고 판매하기에 급급했던 정작 책을 읽는 행위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게 독서란 언제나 혼자 하는 무엇이었다. 혼자 읽고, 혼자 독백 같은 책 소개를 쓰고, 혼자 감탄하고 슬퍼하는 일. 언니는 책은 읽고서 홀로 즐거워하기보다 아니라 함께 읽고 나눌 때 더욱 좋아지고 깊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내게 닿은 좋은 것을 나누고 그것에 기뻐하는 마음. 순간 언니가 꾸렸던 작은 책방의 서가가 떠올랐다. 유명하진 않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를 모으는 사람. 편견 없이 책을 읽고 그것의 가치를 알아보는 언니다운 말이었다.
새롭게 무언가를 시작하는 일에 선뜻 마음이 내키진 않았다. 그럼에도 미루지 않고 독서모임을 꾸렸다. 책방을 위해선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독서모임에 한 번도 참여해보지 않고서 독서모임을 꾸릴 수 있을까. 이 작은 책방에서 열리는 독서모임에 누가 올까. 자조적인 염려도 잠시. 생각보다 수월하게 신청자들이 모였다. 나를 포함한 독서모임 참여자는 7명. 모두 여자였다. 그리고 그중엔 국화 언니도 있었다. 언니는 꽤 오래 지인들과 독서모임을 해오고 있었으므로 언니의 존재는 내게 큰 안심이었다. 불확실함과 의구심이 들 때면 국화언니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금세 마음이 든든해졌다.
독서모임은 마치 내 삶에 원래 존재했던 것처럼 순조롭게 흘러갔다. 어려운 일이라곤 없었고, 오히려 언니의 말처럼 좋은 것을 나누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다. 당시 우리 책방에서 남매의 역할은 분리되어 있었고 책과 관련된 일은 오직 내 몫이었기에 독서 모임의 존재는 내게 더욱 각별한 것이 되어갔다. 책이라는 경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안전한 대화. 비교하거나 비난하지 않고도 순수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독서모임에서 배웠다.
연령대나 독서의 취향은 달랐지만 한 권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좋았다. 책을 덮고 일어날 때면 늘 같은 마음으로 자리를 떠날 수 있다는 사실에 늘 감탄했다.
모임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자주 울었다. 책 속의 인물이 나 같아서 울고, 혹은 내 삶과 너무 먼 것 같아서 울고. 그렇게 우는 사람 곁에 앉아 있다 보니 눈물이 전염되어 우는 날도 있었다. 나 역시 많이 울었다. 모든 눈물이 슬픔이나 통한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었다. 눈물은 지나와서 다행이라는 마음에 안도하는 마음이기도 했고, 반대로 돌아갈 수 없어서 그리운 마음에서 올 때도 있었다. 이유야 무엇이든 내가 울면 국화언니는 꼭 따라서 울곤 했다.
그렇게 6년 간 2주에 한 번. 언니와 나는 함께 책을 읽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모임에는 들고 나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했다. 언니 역시 둘째를 낳고 회복하는 동안 잠시 독서모임을 잠시 멈추기도 했지만 독서모임에 돌아오길 강하게 원했다.
독서 모임에서 언니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육아를 하며 우는 아이를 달래는 일의 고단함에 대해, 외롭고 지난한 시간. 우는 아이를 품에 안고 크게 소리 내어 시를 읽었던 밤에 대해서. 언니가 자신의 유년에 대해 말하던 날. 할아버지가 지어준 국화라는 이름의 소중함을 힘주어 말하던 눈빛은 여전히 선연하다.
언니는 환경적인 제약 때문에 딸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지 못하는 걸 늘 안타까워했는데,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해야지 어쩌겠냐며 구글로 미술관의 작품을 검색해서 보았던 얘기를 하기도 했다. 자칫 서글픔으로 흐를 법한 순간에 언니는 웃으며 ‘그 순간이야 말로 진정한 <방구석 미술관>이었다’며 웃어넘겼다.
언니는 슬픔을 슬픔으로만 두지 않았고 환경적인 약점에 대해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았다. 나는 언니의 그런 강인함이, 잘 사는 일이 물질적인 것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의 얼굴이 좋았다. 동시에 알고 싶었다. 무엇이 언니를 그렇게 건강하게 만드는 것인지. 삶의 구질구질한 순간들 앞에서 누추하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사는 태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우리가 독서모임을 하며 7번째로 함께 가을을 맞았을 무렵. 언니는 내게 독서모임을 잠시 쉬겠다고 했다. 일이 바쁘다고 말했지만 직감적으로 알았다. 바쁘다는 말은 언니의 쉬운 핑계일 뿐, 다른 문제가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