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카를로스라는 신 알아?”작은 딸이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는 내 얼굴을 마주하고 했던 첫마디입니다. “모르는데?” 했더니 아이가 신나게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그 당시 유행처럼 회자되던 기회의 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탈리아 토리노 박물관에는 특이한 조각상이 있습니다. 많은 신상이 그렇듯 이 신상도 벌거벗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머리카락 모양이 특이합니다. 풍성한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있지만 뒤통수는 민머리입니다.
머리카락에 얼굴이 가려 사람들이 카를로스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지만그가 기회의 신이라는 것을 알아보기만 한다면 풍성한 앞 머리카락을 잡아채면 된다는군요. 하지만 순간적으로 지나쳐 버리면 뒤통수는 머리카락이 없으니 잡을 수가 없답니다. 옷이라도 입고 있다면 옷자락을 잡으면 되겠지만 벌거벗고 있으니 마땅히 잡을 곳이 없다더군요. 게다가 발에 날개가 달렸으니 쏜살같이 도망쳐 버린답니다.
왼손에는 저울과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데 정확한 판단과 결단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하는군요.
당시 자기 계발서나 강연에 자주 등장하던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게 학교 선생님이나 학원 선생님들 간에 유행이었던지 큰 아이도 학교에서 같은 이야기를 듣고 왔다면서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날 이후에도 여기저기서 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같이 언제 찾아올지 모를 기회를 잡기 위해 철저히 준비하고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기회의 신 카를로스는 얼마나 얄미운 신인가요. 보이자마자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해서 낚아챌 수 없다면 도망가는 속도가 너무 빨라 잡을 수 없다니 말입니다. 이 정도면 기회라기보다 요행에 가깝습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카를로스 이야기를 듣고 기회는 언제든 다시 너에게 돌아올 테니 카를로스의 앞머리를 잡아 채기 위해서 늘 긴장하고 살 필요는 없다고 했습니다. 카를로스가 아무리 날쌔다고 하더라도 자동차나 비행기만큼은 빠르지 않을 테니 비행기를 타고 쫒아 가 잡으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두 딸 모두 신나게 웃어젖히더군요. 나는 요즘은 스스로 기회를 만드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굳이 카를로스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말을 덧붙여 줬습니다.
나는 지금 까지 살아오면서 ‘기회’라는 녀석이 눈치채기 어렵게 갑작스럽게 다가왔다가 쏜살같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스 시대에는 기회가 카를로스처럼 왔는지 모르겠지만 현대사회에서 ‘기회’는 노선버스처럼 옵니다. 시간은 좀 늦어지겠지만 잡으려는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다시 올라탈 수 있는 노선버스 말입니다.
같은 목적지로 가는 노선버스는 한 대가 아닙니다. 버스비가 비싸고 자주 오지 않지만 고속으로 가는 버스도 있고 저렴한 비용으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우회 버스도 있습니다. 요즘은 내가 타야 할 버스의 번호만 알면 버스가 언제 올 것인지 알 수도 있습니다. 갈아타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버스를 한 대 놓쳤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다음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서 견뎌야 하는 시련은 있습니다. 날씨가 험악할 때는 잠시 비바람을 피할 공간이 필요할 테고 다음 버스를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이 필요할 겁니다. 승객이 너무 많아서 힘겹게 탈 수도 있고 그마저도 밀려나서 못 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럴 때는 목적지를 수정하거나 돌아가는 노선을 선택할 용기도 필요합니다. 물론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수고를 마다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버스비를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한번 놓친 기회는 다시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칼를로스처럼 쏜살같이 지나쳐 버린 기회를 잡지 못한 것만 후회하느라 다음에 다시 올 기회를 잡을 준비조차 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낙심이 너무 커서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언제 올지모 모르는 칼를로스를 잡겠다고 잠도 못 자고 즐기지도 못한 체 자신을 괴롭히며 조바심을 냅니다.
좋은 학교에 진학할 기회, 돈을 많이 벌 기회, 좋은 직장을 얻을 기회, 건강하게 오래 살 기회, 행복하게 살 기회를 어느 순간 자칫 잘못해서 놓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그들을 더욱더 긴장하게 만듭니다. 더 큰 문제는 다른 사람보다 먼저 칼를로스를 잡고 싶거나 경쟁자에게 밀려 기회를 잡지 못할까 봐 타인과 힘을 합해 기회를 잡을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남이 만든 기회를 잡으려고 기다리기만 하느라 여러 사람이 모여 대절버스처럼 스스로 기회를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도 미처 못하 것 같습니다.
나는 이제 50여 년을 살았습니다. 나도 수많은 노선버스를 놓쳐봤습니다. 별로 어렵지 않게 목적지에 도착해보니 내가 원하던 곳이 아닐 때도 있었습니다. 요즈음엔 글쓰기라는 낯선 목적지를 향해 버스를 갈아타려고 노력 중입니다. 사실 큰 용기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보고 싶습니다.
내 딸들은 어쩌면 더 먼 행선지를 행해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훨씬 더 오래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고 그만큼 고될 겁니다. 그러다가 자칫 기회를 놓쳐 상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 딸들에게 인생을 살다 보면 가끔은 행선지를 바꿀 수도 있고 버스를 놓칠 수도 있으니 그럴 때는 다음 기회를 기다리면 된다고 말해줍니다. 다음 버스나 비행기나 심지어 도착지까지 가려면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는 배 조차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내 앞에 와서 정차하고 문을 열어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