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이 어릴 때 읽었던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책의 내용을 기억하니? 나무는 주인공의 놀이터가 되어주고 그늘을 만들어 주고 달콤한 사과 열매를 주고, 심지어 몸통과 가지를 모두 내어주고 결국 밑동만 남게 되지. 그럼에도 나무는 모든 것을 줄 수 있어서, 행복했노라고 말하지.
「“미안하다. 무엇이든 너에게 주고 싶은데. 내게 남은 것이라곤 늙어빠진 나무 밑동뿐이야. 미안해.” 나무가 말하자 늙은 남자는 “내게 필요한 것은 없어. 앉아 쉴 자리만 있으면 좋겠어.” 나무가 대답합니다. “앉아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동보다 더 좋은 곳은 없지. 이리 와서 앉아 푹 쉬도록 해.” 남자는 시키는 대로 나무 밑동에 걸쳐 앉았습니다. 나무는 행복했습니다.」라는 구절에서는 나무의 희생과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게 돼. 나무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존재임에 틀림없어.
인간관계에서도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존재가 있잖아?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으며 부모님을 떠올릴 거야. 나도 그랬지. 대가를 바라지 않는 부모님의 헌신과 사랑에 감사하게 되더구나.
나도 부모가 된 후로 너희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존재로 살고 싶었어. 하지만 그건 내 욕심이었다는 것을 종종 깨닫게 된단다. 내 딸들이 나이가 들어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고 있는데, 보고 싶다는 핑계로 가까이에 불러들일까 싶다가도 금세 마음을 고쳐 먹어야 했고, 때로는 걱정이 지나쳐서 이것저것 간섭도 하고 그러다 보면 하지 말아야 할 말, 해봐야 아무에게도 득 될 것이 없는 쓸데없는 말을 하기도 했어. 그리곤 ‘앗차! 하며 후회할 때도 많았거든. 사실, 어제도 큰딸과 작은 실랑이를 하고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단다. 네가 받을 상처에 마음이 아팠으니까.
북미지역이나 유럽의 경우 단독 주택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아파트 같은 공동 주택도 100년을 훌쩍 넘긴 고택이 많지. 대부분 건물의 골격만 유지한 체 리모델링을 하거나 꾸준히 하자보수를 해서 안전상의 문제는 없다더라. 그런데 오래된 건물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경우도 왕왕 있게 마련이고 , 결국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차라리 다 때려 부수고 새로 짖기도 하지만 경제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오래 방치하기도 하더구나. 오래된 집일수록 겉모습만 봐서는 그 집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없단다.
그래서 서양에서 집을 살 때는 반드시 공인된 전문가를 불러 안전 점검을 해야 한단다. 특히 단독주택을 살 때는 꼼꼼히 따져봐야 하는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집 주변에 있는 나무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한겨울 남향집 마당에 커다랗게 자리 잡은 나무가 햇볕을 가리는 것 정도는 애교 수준이고, 나뭇잎이 빗물받이나 굴뚝을 막아 버리기도 하고, 겉으로 보이지 않는 나무뿌리가 벽을 뚫고 들어가 곳곳에 누수가 생기거나 집의 기초를 허물어 버리는 심각한 상황이 이르기도 하지. 번개에 맞아 꺾인 나무 가지가 집 지붕을 덮치기도 하고 비바람에 나무가 둥치째 넘어져 사람을 헤치는 일도 다반사다.
집주인들은 시시때때로 집 뜰에 있는 나뭇가지를 손보거나 너무 커버린 나무는 시청의 허가를 받아 베어내기도 하지. 나무가 집 뜰에 있을 때 좋은 점도 많지만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거침없이 뿌리를 확장하는 나무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어느 날 크게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지.
오늘 나는 문뜩 내가 혹시 너희들에게 너무 가까이에 서 있는 위험한 나무는 아닐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답시고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너희가 입는 상처를 간과한 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에 가슴 한편이 아릿하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는 이제 서로 좀 더 적당한 거리를 잘 유지하며 살기로 하자.
사실, 나도 너희들과 멀어지는 연습을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꾸준히 해 왔단다. 태중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너희들은 조금씩 나와 멀어지고 있다는 걸 내가 모르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랫동안 너희와 한 몸인 줄 착각하며 살아왔나 보다. 너희가 기쁘고 행복할 때, 자부심으로 가득한 자랑스러운 모습을 볼 때 나도 너희처럼 기뻤고 , 너희 자존감이 무너질 때 , 열등감과 조바심과 무기력감과 두려움 때문에 고통스러워할 때 나도 같이 무너졌으니까.
나는 때로 너희 친구 부모들과 나 스스로를 비교하기도 했고 무능한 나를 돌아보며 수치스럽거나 화가 난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며 너희들과 멀어지려고 노력해야 했다. 그래야만 겨우 나를 일으켜 세워 출근하고 밥 하고 빨래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너희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으니까. 자칫, 나와 너희들을 한 몸 인양 착각한 나머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데까지 욕심을 부릴 것 같아 두렵기도 했거든.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너희가 가는 길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까 봐 미리 걱정하거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너희를 강제로 끌고 가려한다거나 너희가 사는 모습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간섭한다거나.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단다.
다만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우리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척도가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 얼마만큼이 적당한 거리인지 알 수 없구나. 양팔을 벌려 닿지 않을 거리, 차를 타고 한 시간쯤 가야 만날 수 있는 거리, 비행기를 타야 만날 수 있는 거리. 그런 수치화된 기준이 있다면 차라리 편할 텐데, 마음의 거리는 훨씬 복잡한 방정식이 필요하겠지. 대충 눈치로 감을 잡아 상처 주지 않을 만큼 거리를 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니까.
부모나 가까운 사람 말에 상처를 더 크게 받는 이유는, 나를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할 것 같은 사람이 마치 나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말하고 강제하고 억압하려 하기 때문 일거야. 그 사람을 너무 가깝게 여기고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으니 더 괴롭지. 하지만 그럴 때, 한발 물러서서 그 관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지!” 하고 생각하게 되더라. 아무리 엄마라고 하더라도 네가 아니기 때문에 너의 속을 다 알 수 없는 거야. 그러니 마치 남을 대하듯,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길 바란다.
내가 설령 너희에게 과하게 간섭하거나 상처 주는 말을 하거든, ’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려니 ‘ 하고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도 괜찮다. 나도 내 것을 몽땅 털어서 너희에게 아낌없이 주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고 나는 나, 너희들은 너희들이라고 생각하며 나를 다독여 볼게. 코로나가 그렇듯,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때, 너희도 나도 건강하게 살 수 있을 테니까.
비단 부모와의 관계뿐일까? 주기적으로 나무의 가지를 치고 뿌리가 어디까지 뻗었는지 확인해 혹시라도 모를 붕괴사고를 미연에 방지해야 하는 것처럼 모든 인간관계, 특히 가깝다고 여기는 사람과의 관계는 언제나 확인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을 테니 더 말할 필요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