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올락 말락 한 날씨. 1층에 내려와서 하늘을 보니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지만 점심 먹으러 갈 팀원들이 내려와 있으니 혼자 우산 가지러 올라가기도 뭣하다. 설마 오겠어? (결국 밥 다 먹고 다니 흠뻑 와버림)
지상 최대의 고민, 이 시국 최대의 난제, 국민의 선택을 필요로 하는 직장인 점심시간 메뉴. 뭐 먹냐? 뭐 먹지? 뭐먹새 무한 반복하다 자주 가는 집으로 낙찰. 이럴 거면 뭣하러 고민한겨? 점심메뉴 고를 때 책임 회피가 필요한데 괜히 안 가본데 추천했다가 별로면 욕받이 되므로 결국 최종 선택은 맨날 가던 데로 결정된다.
매장에 도착해 자리에 앉아 항상 먹던 메뉴 시켜서 먹기 시작하는데 사장님이 슬쩍 오시더니 묻는다.
"코딩하는 개발자들?"
우리 팀도 단골이지만 회사 사람들도 단골인 집이라 IT 회사라는 걸 사장님도 알고 있고, 또 굳이 묻지 않아도 다 개발자같이 생겼기에. 흠흠. 그리곤 이것저것 묻는데 대략 얘기를 들어보니 사장님 자녀에게 코딩 조기교육을 시키고 싶은가 보다. 저번에도 은근슬쩍 물어보더니 오늘 또 묻는다. 앞으로 개발자란 직업이 유망하고 돈도 잘 번다고 하니 관심이 생긴 거겠지.
같이 간 팀원들이 답변을 하고 있어서 난 옆에서 가만히 고개 숙이고 쳐묵 쳐묵. 밥 먹는데 이런 질문받는 것이 부담스럽다. 매장도 시끄러워서 원활한 대화도 안되고. 질문의 막바지쯤 사장님이 또 묻는다.
"영어도 잘해야 하나?"
코딩을 영어로 하니 영어도 잘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하셨나 보다. 그런데 팀원들의 답변에 헉! 하고 말았다.
"아니, 필요 없어요"
매우 중요한 답변인데 아무렇지 않게 저런 식으로 가이드를 해주다니. 한마디 하려다 분위기상 입 꾹 다물고 넘어갔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개발자도 영어 잘해야 한다. 영어 못 해도 개발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저 그런 개발자로 남을 확률이 99%다. 돈도 잘 벌고 유명한 회사에서 일하는 개발자가 되려면 영어를 잘해야 한다. 그러는 나는 영어를 잘하는가? 못해서 그저 그런 개발자이다. 영어만 잘하면 좋은 개발자인가? 그건 아니지만 개발자도 영어를 잘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1.
대한민국 인구 5천만, 그나마도 감소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개발자들이 몇 명이나 될까? 개발자 부족하다는 얘기는 왜 계속 나올까? 잘하는 개발자가 부족하단 얘기이지만 그럼 잘하는 개발자는 왜 부족한 걸까? 개발자의 절대수도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어를 하는 개발자가 한 움큼밖에 안되는데 우리끼리 잘하면 얼마나 잘할 수 있겠나? 대한민국 개발자 생태계는 언어 때문에 갈라파고스이다. 갈라파고스를 벗어나려면 영어라는 여권이 필수다.
2.
개발을 하다 궁금한 게 있다. 믿을 건 구글링뿐. 무한 구글링으로 정답을 찾는 경우도 있고 못 찾는 경우도 있다. 거기서 소모되는 시간과 에너지로 하루를 날려 버리기도 한다. 그때 검색되는 많은 문서가 영문이다. 한국인 개발자보다 영어를 사용하는 개발자가 훨씬 많으니 많은 해결책이 영문으로 되어 있다. 영문으로 되어 있는 페이지, 나도 대충 읽을 줄 안다. 정 안되면 구글 번역기를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한계가 있다. 많은 영문 페이지를 원어로 읽다가 읽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스킵해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버려지는 페이지에 정답이 있을 수도 있다. 영어를 잘했다면 구글링도 개발도 참 쉬웠을 텐데.
3.
그래, 모르면 인터넷에 질문을 올리자. 어디다 올릴 것인가? 네이버 지식인? 스택오버플로우라는 사이트가 있다. 세계적인 사이트이다. 개발자용 지식인 같은 사이트이다. 모르는 게 있고 찾아도 못 찾겠으면 여기다 질문을 올리면 되는데 그럼 해답에 좀 더 빨리 다가갔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런 생각을 얼마 전에 했다. 개발 경력이 10년이 훨씬 넘었는데 이런 생각을 이제야 했다. 왜 이제 했을까? 영작문이 약하니 그런 생각 자체를 못한 것이다. 문법 좀 틀려도 대충 적어서 올렸어도 답변이 달렸을 것이다. 영문법, 영작문이 문제가 아니라 영어를 못하니 질문할 생각 자체를 못한 게 문제다. 생각의 크기가 영어 때문에 꽉 갇혀있었단 것이다.
4.
자동차가 한 대 있다. 미국에서 만든 것이다. 고장이 나서 고쳐야 한다. 전 세계 엔지니어들이 모여서 문제를 찾고 수리를 한다. 당연히 공용어 영어를 사용해 토론하고 있다. 그럼 한국어밖에 할 줄 모르는 나는?
"Hey, Mr. Kim"
성만 불렸는데 동공이 커지고 등에서 땀 한줄기가 흐른다.
IT 업계를 이끄는 건 미국이다. 세계 최대의 IT 회사들이 전부 미국 회사다. 우리가 쓰는 개발 언어도 거의다 미국에서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미국이 답이다. 그런데 영어를 모른다면? 눈을 감고 고장 난 자동차를 고치는 겪이다.
5.
유튜브나 블로그에 개발과 관련한 좋은 영상과 글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진짜 좋은 영상과 글은 영어로 되어 있다. 난 영어를 잘 못하고 그것들이 영어로 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일단 보는데 거부감과 부담감이 든다. 영상 보고 글 읽는다고 좋은 개발자가 되는 건 아니지만 좋은 개발자는 그 정도는 다 보고 읽고 한다는 점.
사장님 질문에 대한 답변 (찾아가서 다시 얘기해 주고 싶은데...)
- 코딩 학원 보내고 싶은데?
개발로 크게 될 인물이었으면 벌써 알아서 개발 시작했을 거예요. 시작은 스스로 찾아서 충분히 할 수 있거든요. 괜히 형식적인 조기 교육으로 흥미마저 잃어버릴까 걱정됩니다. 아이의 의사에 전적으로 따르세요.
- 개발자, 돈 잘 벌고 미래가 보장되나?
미래가 보장되는 직업은 없어요. 지금 좋아 보여도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사장님이 원하는 돈 잘 버는 개발자도 정말 잘하는, 탑티어에서 노는 사람들 얘기예요. 보통의 그저 그런 개발자들은 중소기업 연봉받아요.
- 영어를 잘해야 하나?
못해도 할 수는 있는데 사장님이 아이에게 바라는 돈 잘 벌고 유능한 개발자가 되려면 무조건 영어 잘해야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