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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쁜남자 Apr 22. 2024

무언가가 냉장고 밑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작고 검은 그 무언가가 말이다.

2주간의 출장을 마치고 내가 살던 대전으로 가는 날이다. 하는 일이 조금 남달라 1박 2일간의 짧은 출장보다는 1~2주 길게는 한 달간의 장기 출장이 잦은 편이다. 대전을 떠나 타지에서 지낼 때는 주로 모텔에서 생활한다. 현장에서 퇴근 후 모텔에 들어오면 침구류는 이미 정리되어 있고, 쓰레기통은 이미 비워져 있고, 냉장고에 물은 이미 새로 채워져 있다. 



크게 신경 쓸 일이 없는 모텔생활이 마냥 좋을 것 같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살던 집이 최고다. 누구 하나 반겨주는 이 없고, 작고 낡고 지저분한 원룸이지만,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은 무시할 수 없다. 그렇기에 장기출장을 마치고 대전으로 복귀하는 날은 늘 기분이 좋다. 








드디어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원룸 앞에 도착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도어락 번호 4자리를 누른다. 



“띠 띠 띠 띠 철컥”



이제 나는 출장 때 챙겨갔던 짐을 내려놓고, 후다닥 씻은 다음, 모텔 침대보다 편한 내 작은 침대에 누워 푹 쉴 수 있다. 로또 당첨번호를 확인하는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연다.



“어?!”



분명히 봤다. 정말로 봤다. 4시간 동안 운전한 탓에 피곤에 쩔어 헛것을 본 게 아니다. 분명히 내 눈으로 봤다. 무언가가 냉장고 밑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작고 검은 그 무언가가 말이다. 



살아 숨 쉬는 것은 나 하나 밖에 없는 집이다. 나 말고 움직이는 건 그 무엇도 없는 집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문 앞에 서있는데, 집안에서 움직일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짧은 시간이었지만, 분명 그 무언가는 개미보다는 컸고, 쥐보다는 작았다. 그 무언가가 귀신이 아니고서야 바퀴벌레 아니면 설명할 방법이 없다. 



‘내가 사는 집에 바퀴벌레가 있다. 내가 사는 집에 바퀴벌레가 있다.’



내가 태어나서 아주 어렸을 적에만 잠깐 작은 주택에서 살았지 그 뒤로 30년 넘게 아파트에서 살아온 차가운 도시남자다. 아파트에 살면서 바퀴벌레를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놈의 작고 낡고 지저분한 원룸에 바퀴벌레가 있다니.



빨리 집에 들어가 짐을 내려놓고 냉장고에 앞에서 발을 구른다. 이 녀석이 냉장고 밑에서 나오면 발로 밟아 죽일 작정이다. 그런데 그 녀석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하~ 망했다.”



방안에서 바퀴벌레 한 마리가 발견되면, 그건 이미 집안 전체에 바퀴벌레가 깔린 것이라고 들었다.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 즉시, 다이소에 가서 바퀴벌레 퇴치약을 잔뜩 구매했다. 여담이지만, 바퀴벌레 퇴치약 포장지에 큼지막한 바퀴벌레가 그려져 있는데, 어찌나 집어 들기가 싫던지. 바퀴벌레 퇴치약 파는 사장님들!! 그 징그러운 포장지 디자인 좀 바꿔주세요!!!



집에 와서 방안 구석구석에 바퀴벌레 퇴치약을 놓아두었다. 그래도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책상에 앉아있으면 괜스레 옆에 무언가가 슥 지나간 것 같고, 불을 끄고 잠들고 있는 사이에 그 녀석이 나를 비웃으며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닐 것 같았다. 심지어 점심 먹으러 간 식당에서 나온 새우볶음반찬만 봐도 흠칫 놀라곤 했다. 집에 있는 내내 온 신경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 바퀴벌레에 집중되니 쉬는 게 쉬는 것 같지 않았다.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인류가 탄생한 이래, 그 누구도 명쾌하게 답을 내놓지 못한 그 질문을 바퀴벌레 앞에서 던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찮게 방송인 조영구씨가 나오는 이사 업체 광고를 보게 되었다. 나도 언젠가는 바퀴벌레 나오는 이 원룸에서 벗어나 깨끗하고 깔끔한 집으로 이사를 가겠노라 다짐하며 광고를 보는데, 광고음악이 귀에 들어왔다.



“영구 영구 영구 이사~ 이삿날이 즐거워요~ 영구 영구 영구 이사~ 이삿날이 휴일 돼요~ 즐거운 영구~ 편안한 영구~”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광고음악이다. 이 노래의 원곡은 멕시코 민요 [라쿠카라차(La cucaracha)]라는 곡이다. 1910년 멕시코 혁명 당시, 독재 정부에 대항한 농민들이 자신들을 밟아도 다시 살아나는 생명력 강한 바퀴벌레에 비유하여 부른 노래다. 라쿠카라차가 바로 멕시코어로 바퀴벌레라는 뜻이다. 무척 흥겹고 신나는 노래지만, 곡 내면에는 가난한 민중의 피와 눈물이 담겨있다.



내 집에서 나온 바퀴벌레가 목숨 걸고 투쟁하는 멕시코 농민들과 교차되면서 측은감이 느껴졌다. 나에게 해코지하는 건 아니니 네가 알아서 눈치껏 잘 숨어 잘 살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녀석을 어떻게든 잊고 살려고 애썼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시간이 지나니 어떻게든 살기는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빨래를 하려고 세탁실에 가니 세탁기 바로 밑에 바퀴벌레 한 마리가 죽어있는 거 아닌가. 바퀴벌레 퇴치약이 효과가 있던 것일까? 그렇다고 이 녀석이 저번에 봤던 그 녀석이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네가 살았든 죽었든 상관없으니 그저 내 눈앞에만 나타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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