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2000)
*미완성이고 나중에 이어서 쓸 예정.
영화 <유레카>가 가로로 널찍한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선보일 때, 그 화면에는 '전통 일본 영화'에서 보임직한 계산된 화면 활용의 낌새는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유레카>는 시네마스코프의 스케일에 주목하듯 볼거리 그 자체인 (어쩌면 좁은 의미의) 스펙터클의 나열에 더 치중하는 듯하다. 물론 3시간 37분에 달하는 <유레카>가 스펙터클 나열에 할애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럼에도 그 짧은 스펙터클이 등장하는 순간의 무게는 결코 시간에 비례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일단, 그 스펙터클은 영화에서 '중요한' 순간들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항공 촬영으로 담기게 되는 엔딩의 풍경은 두말할 필요가 없어 보이고, 세 명의 인물들이 올라와 다다른 산에서 연기 혹은 안개가 피어오를 때의 풍경 역시 의미심장하게 담겨있다. 이 풍경의 스펙터클들은 서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면서, 짧은 순간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을 발한다. 그리고 동어반복과도 같지만, 이 존재감 혹은 무게감은 스펙터클들이 시네마스코프로 담겨 있기 때문에 획득되는 것이기도 하다.
짧고 강렬한 스펙터클로서의 풍경들과, 버스를 타고 전전하면서 비춰지는 배경 곳곳의 모습들은 <유레카>에 굳이 일본영화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게 만든다. 비록 제시되는 풍경과 배경들이 유별난 국적성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일본에서 촬영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이 볼거리들이 시네마스코프라는 유별난 창을 통해 담겨 있다는 사실 때문에 국적성이 희박함에도 <유레카>는 어쩔 수 없이 일본을 극적으로 드러내고야 만다. 볼거리로 제시되는 일본의 모습들에 기반한 이와 같은 감상은 시지각에 따른 단순한 반응에 다름아니다. 이는 영화의 출발점이 되는 사건이 20세기말 일본의 사회를 얼마간 반영하고 있다는 식의 연결짓기나 "지금 찍어내야만 하는 것이 있는 것 같다"라는 일본인 감독의 말에 근거해 연결짓고픈 일본-영화가 아니라, 시네마스코프 안에서 보여지는 볼거리에 대한 단순한 감상으로써 일본영화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유레카>의 볼거리들은 버스의 창을 통해 얼핏 비춰지고, 스펙터클은 순간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볼거리-스펙터클의 의미심장함과 중요함은 전혀 퇴색되지 않는데, 역시 동어반복처럼 들리지만 그것들이 영화 내내 보여지던 것이 아니었기에 의미심장하고 중요하게 여겨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볼거리들은 사건 뒤에 남겨진 사람들끼리 만들어낸 세계가 지속적으로 폐쇄적이었다는 것이 확인되기 때문에 유의미해진다. 이 스펙터클의 남다름은 남겨진 사람들끼리 형성해나가는 안쪽의 세계가 집-공간을 벗어나게 되는 순간의 감흥과 같은 궤에 놓여있다. 도망 또는 떠남을 스스로 실행해본 적이 있는 사와이와 달리, 남매는 사건의 뒤에 남겨진 이후로도 그의 부모들이 그들을 떠나면서 언제고 남겨진, 그래서 떠나본 적이 없는, 존재들로 설정되고 있다. 남매의 사촌형이 사와이에게 언제까지 머물 것이냐고 물었을때, 오빠인 나오키가 그 물음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남겨짐에 대한 나오키의 불안한 마음이 불현듯 튀어나온 것이다. 폐쇄적인 집을 벗어나는 순간에야 비로소 볼거리들이 선사될 수 있고, 집에서 버스로 변주되는 공간은 여전히 이들이 폐쇄적인 안쪽의 세계에 머물러 있음을 얼마간 드러내지만, 버스의 사방에 달린 창을 통해 안쪽에서 바깥의 볼거리들을 볼 수 있음으로 안쪽의 세계와 바깥의 세계는 유리된 채로도 공존할 수 있게 된다.
비단 <유레카>의 폐쇄적인 버스는 바깥의 볼거리들이 투과되는 공간에 그치지 않는다. 바깥의 볼거리들은 버스가 움직이기에 그 모습을 끊임없이 바꿔내 보일 수 있다. 더욱이 바깥 세계 그 자체인 스펙터클이라는 광경을 위해 버스는 스펙터클이 자리잡은 그곳으로 향해 나간다. 버스 내부에서 보이는 바깥 세계의 풍경과 배경이 볼거리 그 자체로 제시되기보다 굳이 버스 내부의 모습을 프레임에 걸친 채로 연출된 숏들은 버스라는 내부 세계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으로 느껴졌다. 버스의 내부에서 외부를 향하는 숏 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버스 자체를 포착하는 순간은 더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버스를 드러내 보인다. 특히나 이 때의 움직이는 버스는 그 자체로 스펙터클이 되어 장면화된다. 버스 그 자체의 움직임이 운동-이미지로 나타날 때, <유레카>의 카메라는 시네마스코프의 가로로 길쭉한 화면을 활용해 수평운동하는 버스를 잡아낸다. 포장되지 않은 길 위에서 삐걱거리며 내달리는 버스는 화면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로질러 내달리고, 이 순간 유리된듯 보인 버스와 풍경은 잠깐이나마 일체가 된 스펙터클로서 등장한다.
버스의 운동-이미지와 관련해 눈에 띄는 움직임은 이 버스가 번번이 제 항로를 옆으로 꺾어 내고 있는 점이다. <유레카>의 버스는 곧이 곧대로의 길을 따라 일직선 운동을 한다기보다 오른편으로 난 골목으로 방향을 바꾼다거나, 구불거리는 옆길로 새어 나가 버리곤 한다. 버스를 몰고 있는 사람이 사와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와 같은 움직임은 단순한 방향전환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앞서도 언급했듯, 사와이는 도망 또는 떠남을 실행했고, 다시 돌아와서도 그의 집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나오키, 코즈에 남매가 살고 있는 집으로 방향을 돌렸다. 사와이의 가족이나 전 아내의 언급에 따르면 사와이는 자주 도망을 쳐버리기 일쑤여서 그것은 나약하게 보일 법도 하지만 정작 도망 또는 떠남이라는 이탈은 사와이 스스로가 자기 결단에 따라 내린 자기 구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와이에게 '도망치는 것은 도움이 된다.' 이탈을 실행하는 사와이의 삶은 그가 운전하는 버스의 움직임에 포개져, 버스 역시 자주 방향을 바꿔 버리곤 하는 것이다.
사와이가 남매의 집으로 향하는 꺾임이 남매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은 그들의 동거 생활을 비추어 볼 때 분명해 보인다. 종국에 사와이는 자신이 실행했던 도망 (또는 떠남)이라는 이탈 (또는 꺾임)을 남매에게 건넨다. 도망을 가능케하는 수단이 그들의 트라우마와 관련된 버스로 설정되고 있는 것은 실상 그들이 실행하는 도망이라는 행동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니다. 어쨌든 이들 셋(넷)은 결단을 내리고, 도망을 쳐, 움직인다. 도망이라는 용단을 내림으로써 이제 남겨진 자들은 떠나는 자들이 된다. 여정이 시작됨과 동시에 시작점이 제시되는데 그곳은 다시 또 그들의 트라우마와 관련된 장소로 설정된다. 역시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트라우마를 마주하게 됐다는 것이라기보다 시작점 그 자체가 설정됐다는 것이다. 시작점이 설정됐고, 그것이 퇴보이든 진보이든 꺾어지고 마는 운동이든 이들은 어찌됐든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 따르면, 사와이가 나오키의 범행을 알고 난 뒤 나오키를 자전거에 태워 빙글빙글 도는 행동에 나름의 해석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제시되는 원운동의 이미지는 시작도 끝도 없이 돌고야 마는 이미지이고, 이는 시작도 끝도 없이 집에만 남겨진 생활과 조응하는 이미지다. 사와이가 도망을 치고, 사와이와 함께 남매가 집을 떠나고, 버스가 방향을 꺾는 것은 모두 '경로-이탈'이라는 이미지를 형성해낸다. 이런 경로 이탈과 대비되는 이미지라는 것은 같은 곳으로 계속 돌아오는 원-운동의 이미지다. 사와이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내면의 걱정이 은연중에 튀어나온 것처럼, 사와이가 나오키를 자전거에 태운 채로 몇바퀴나 같은 장소를 돌고야 말 때, 시작점을 설정하고 도망 또는 떠남을 결단한 나오키에게 그것은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경험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었으리라. 이 장면 이후에 나오키는 사와이의 권유에 따라 자신의 범행을 자백하러 경찰서로 향한다.
사실 원운동이나 꺾임과 같은 이야기는 도상적인 운동-이미지 해석에 불과할 뿐이고, 정작 <유레카>를 보면서 흥미로웠던 순간은 아오야마 신지가 운동 그 자체를 스펙터클화 시킬 줄 안다는 것이 드러나는 장면들을 볼 때였다. 안쪽 세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물들은 필연적으로 바깥과 충돌할 수 밖에 없고, 그 충돌의 표출 역시 필연적인 것이라면, 충돌이 드러나는 순간을 포함해 그 전까지의 과정에는 끊임없이 긴장감이 돌기 마련이다. 나오키가 집으로부터 벗어나 버스에 오르는 행위는 이제껏 남매가 남겨짐으로써 그들에게 쌓였던 상흔들을 극복하는 순간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안에서 밖으로의 이동과 관계된 것이기에 이후 지속적으로 일어날 충돌이 예고되는 장면이다. 더욱이 나오키에 관해서라면 차분해 보이는 외양 아래에 폭력적인 충동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 앞서부터 보여지고 있기 때문에 유의깊게 지켜볼 수 밖에 없다. (눈썰미 좋은 한 감상자는 그가 버스에서 읽고 있는 만화책이 <아키라>라는 것을 지적하기도 했다.)
나오키의 잠재된 충동이 충돌적으로 표출되는 첫 번째 순간은 그가 집-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남겨져 있던 때에 드러나고 있다. 사촌형이 앞마당에서 골프채를 휘두르고 있을 때, 집 안 거실 소파에 누워있던 나오키는 바람을 가르는 골프채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나오키가 칼을 들어 갈대수풀을 난자하듯 베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두고 나오키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가한 폭력을 연상하거나, 사건의 트라우마가 나오키에게 남아 있다거나, 나오키에게 폭력적 충동이 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거나 하는 식의 여러 해석이 가능할테다. 그러나 어떤 해석을 붙이든 그 해석은 장면이 드러나는 순간의 에너지를 압도하진 못한다. 카메라는 난자당한 갈대 줄기에서 수액이 끓어 오르는 것을 클로즈업으로 잡아낸다. 수액의 끓어 오름은 아주 잠깐 등장하고 말지만, 나오키의 충동적 행동이 갈대 줄기로부터 솟구쳐 끓어오르는 수액의 이미지와 연쇄적으로 결합하면서 시네마스코프를 가득히 채우는 이 클로즈업숏에는 에너지가 생겨난다. 아오야마 신지의 카메라는 중력으로부터 역류하는 수액의 미세한 운동을 포착함으로써 이 이미지에 에너지를 부여할 줄 알고, 그것을 스펙터클로써 보여주고 있다.
이런 나오키의 행동을 보고 난 뒤라면, 그리고 갈대 이미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만나고 난 뒤라면, 더이상 나오키를 차분한 남자 아이 정도로 치부하기 어려워진다. 이 연장선 위에서 버스 운전대를 잡으려는 나오키의 행동은 나오키의 충동이 충돌적으로 표출되는 두 번째 순간이다. 나오키가 운전대에 오르는 행동은 남매가 버스에 올라타는 것만큼의 결단처럼 느껴져서 그것은 소위 성장이나 변화를 담지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나오키의 내재된 충동이 표출되던 순간이 눈에 선한지라 이 장면을 아주 긴장하면서 보게 됐다. 이 장면에서 피어나는 긴장감은 첫 번째 순간이라고 기술한 전 장면에 오롯이 기대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운전석에 오른 나오키는 운전대를 잡고, 사와이는 나오키에게 시동 거는 법을 알려준다. 나오키가 시동을 걸기 위해 손을 움직이고, 페달에 디딘 발을 조금씩 움직일 때, 카메라는 나오키의 신체들이 움직이는 것에 주목한다. 손과 발의 움직임은 미세하게 까딱이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지만, 실로 나오키가 시동을 걸어 페달을 쭉 밟아 낸다면, 그 운동은 버스를 통해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는 운동으로 전환될 것이다. 나오키에게는 부글거리는 충동이 내재해있고, 이 에너지(에네르기)는 아주 미세한 동작으로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로든 무한 발산할 수 있는 운동 에너지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아오야마 신지 감독은 이 찰나의 운동, 미세한 운동을 보여냄으로써 세계와 충돌할지도 모르는 나오키의 내면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긴장감이라는 서스펜스를 형성해내고 있다.
나오키의 내면에 머물던 에너지는 손과 발의 움직임을 통해 (조그맣게) 표출되고, 손발의 운동은 다시 버스의 운동으로까지 이어진다. 이 일련의 운동은 보이지 않던 에너지가 보이게 되는 과정이다. 물론 그 운동은 실현되지 못한다. 살인 범죄를 저지른 나오키에게 관객이 쉽사리 이입하기 힘들듯, 나오키는 자신의 범행에 대해 어떻게든 책임을 질 필요가 있고, 영화 역시 이런 나오키에게 쉽사리 구원을 안기지 않는다. 다만, 이 장면으로 인해 내면에서 부글거리는 에너지가 살인이 아닌, 다른 출구로 표출될 수 있다는 것이 모색되고 있으니, 이 정도의 가능성을 보여내는 것만으로도 나오키에게 성장 혹은 변화라는 것이 담지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테다.
나오키와 관련된 이 두 번의 순간은 모두 미세한 운동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고, 두 순간 모두 미세한 운동 이미지로부터 서스펜스를 끌어내고 있다. <유레카>를 흥미롭게 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현란한 움직임이 아님에도 주의깊게 볼 수 밖에 없고, 움직임이 작동하는 순간에 긴장감이 어려 활력을 넘어서는 서스펜스가 이끌어질 때, 이 운동은 그 자체로 스펙터클이 된다. 여기서 운동을 좀 더 넓게 생각해서 시지각적 움직임뿐만 아니라 음향적인 움직임까지도 운동으로 포함시킬 수 있다면, 사와이와 코즈에가 노크를 통해 소통 비슷한 것을 이뤄내는 장면 또한 미세한 운동으로부터 극적인 긴장상태(서스펜스)를 끌어내고 있는 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와이가 건네는 노크는 요란한 소리가 결코 아님에도 침묵을 깨트리는 유일한 소리라는 점 때문에 이 역시 미약하지만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지닌 것으로 느껴진다. 또한, 노크는 분명 음향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두드리는 행위로 생겨나는 소리이기 때문에 청각과 시각이 묘하게 결합된 운동이 된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코즈에에게 어리게 되고, 이로써 코즈에의 내밀한 불안이 시각화된다. 사와이는 예민하게 코즈에의 불안을 감지한다. 불안과 불면에 싸인 코즈에를 위해 사와이는 버스의 벽을 두드리는 노크 행위를 건넴으로써 코즈에를 “염려”한다.
이 노크 행위는 사실 사와이 역시도 건네 받은 것이다. 어느 곳보다 폐쇄적인 감옥이라는 공간 안에서 사와이는 보이지 않는 저 바깥으로부터 노크를 건네 받았다. 사와이는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염려를 받았고, 그 경험을 남매에게 되돌려주고 있다. 아마 사건 이후에 말을 하지 않게 된 코즈에가 그 여파로 자신만의 안쪽 세계를 형성했고, 그 세계 역시 폐쇄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추론일 것이다. 함부로 다가갈 수 없고, 쉽사리 깨지지도 않는 안쪽의 세계를 향해 노크를 하는 것은 그것에 함부로 다가가지 않겠다는, 그것을 쉽사리 깨버리지 않겠다는 염려 어린 행위나 다름없다. 다행히도 사와이가 그러했듯, 코즈에 역시 그 노크에 반응하고 있다. 말을 잃어버린 코즈에가 유일하게 내는 이 소리-운동에 에너지가 자리하고, 내부와 외부의 충돌로 인한 기분 좋은 서스펜스가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코즈에 스스로가 낸 두드림이라는 이 동작은 영화 말미에 세계를 향해 조개를 던지는 동작으로 이어질테다.
다시, 아오야마 신지는 미약한 노크-두드림-운동을 보이고 들려줌으로써 안쪽과 바깥 세계의 창대한 충돌을 일으킨다. 어찌보면 이 여정의 처음서부터 안쪽 세계와 바깥 세계 사이의 충돌은 끊임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그 충돌이 언제나 파열을 일으키는 것은 아닐지라도 충돌의 에너지는 지속적으로 축적되어 왔다. <유레카>는 충돌을 드러내 보이면서 그 충돌의 긴장을 들춰낼 때마다 그것을 운동으로 보여낼 줄 아는 영화다.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충돌로 인한 서스펜스는 영화 내내 지속되고 있었으니 운동은 과잉될 필요가 없다. 위에서 언급한 장면들은 모두 미세한 운동에 불과하지만 충돌이 야기시키는 서스펜스가 영화에 가득차 있으니 이 운동이 볼거리로 제시되는 순간은 언제나 스펙터클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는 "염려"라는 심리 기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단적으로 드러나는 염려는 경찰서로 걸어가는 나오키에게 사와이가 건네는 말에서 드러난다. 사와이는 "살아있으라"라는 말 대신 "죽지 말라"라는 말을 건넨다. 의미상의 차이는 없어보이지만, 각각의 말은 각기 다른 태도를 지니고 있다. (나중에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