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오늘 정지돈 사태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하여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나는 애초에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는지를 생각하는 모습에 나는 아직 대화하는 법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이 글의 모든 내용적 형식적 오류의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음을 밝히면서 이 글을 시작하려 한다.
2.
광장에서 혼자 큰 소리로 나를 좀 봐 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상상을 가끔 한다. 생각만 해도 외롭고 힘든 여정이 기다리는 것 같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우리는 종종 본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는 한다. 옹호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반박을 하는 사람도 있다.
김현지 님은 6월 23일에 <김현지, 김현지 되기>라는 입장문을 통해 공론화를 시작했고, 이 글에는 김현지 님이 광장에 서게 된 이유와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25일 정지돈 님의 입장문이 업로드되었다.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둘 중 하나의 잘못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을 욕하고 끌어내려야 할까? 김현지님은 공론화의 도입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면서 듣는 사람들의 책임성에 대해 언급했다.
광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선정적으로
소비되는 데에 그치는 일이 아니라 참여자들의
태도에 따라 미래로 나아가는 일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김현지, 김현지 되기>에서 직접 인용
나는 당사자인 김현지님과 정지돈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줄 아는 것이 이런 선택밖에 없을지라도 우리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두 명이 같이 지켜지기를 바란다. 우리는 기다려야 하고, 잘 들어야 한다. 김현지 님과 정지돈 님의 이야기에 대해서. 그래서 우리는 같이 이야기하고 대화하며 맞추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정지돈님과 출판사가 이 광장에 걸어 들어오는 것이다. 피하면 안 된다는 소리이다. 회피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뒷걸음을 멈추고 대화에 참여해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 하여야 한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성숙한 듣기고 뭐고 다 소용이 없다.
이 사태의 핵심은 재현윤리에 있다. 무엇이 윤리적이고 무엇이 윤리적이지 않을까? 그리고 이것을 누가 정할까? 나는 우선 법률이 윤리성을 책임질 수 있다는 주장들을 조금 멀리하고 싶다. 법률은 어디까지나 사람과 사람 간의 윤리의 최소치로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거나 훔치는 등의 행위 그 자체로 다소 반윤리적인 그런 것들을 규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은 상호작용을 한다는 소리이다. 인간의 윤리 또한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해왔다. 즉, 윤리는 서로 소통하고 담론장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야지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광장에서 확성기를 들고 있었던 그들을 기억한다. 그들을 나는 아직 잊지 않았다.
3.
저는 정지돈 님과 출판사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선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