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인행 Jul 17. 2018

행복에 관하여.

첫 시작은 너무나도 진부하지만 '행복이란 무엇일까?'라는 주제로 시작을 해보려고 한다.


마치 일기장에서 꼭 한 번 쯤 쓰게되는 주제랄까.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고 항상 불행하기만 했다고 생각했던 아이는 이제 어느덧 24살이란 숫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살면서 어떤 감정을 배우게 되었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을까. 아마도 지금 글은 인생의 반의 반도 안산 나로서 '10년 뒤의 이 글을 읽는 다면 무척이나 부끄럽겠지?' 라는 잠깐의 생각을 하면서 글을 써 내려가보려 한다.


나는 최근까지 내가 무척이나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매번 성공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되새기며 한 시도 나를 가만두지 못하고 괴롭혔고, 밤마다 일을 하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사업의 매출이 줄어드는 것을 보면 스트레스는 극에 달아 남들에게도 그 영향을 미쳐 주변을 불행하게도 만들었었다. 


20살 때부터 나는 그랬었던 것 같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았는지 가만히 앉아 생각을 하다 보니 불행의 근본을 애써 외면하며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되지 않았나 싶다. 난 그래서 내가 생각한 행복의 첫 번째는 과거의 트라우마나 불행을 극복하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 첫 번째 걸음이라고 생각하며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내 친구들 중 꽤 대다수는 과거의 상처를 항상 마음에 두고 산다. 나도 마찬가지고 내 여동생도 마찬가지고 아마 과거의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거의 상처가 경험이 되고 그 경험에 기반한 방어 기재는 사람에게 독이 되기도 때로는 득이 되기도 하지만 나는 독으로 더 큰 작용을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독이 되는 기억들은 모두 지우고자 마음먹었다. 내 10대는 지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대부분의 회고록을 읽다보면 가정 환경이 무척이나 불우하거나 특이한 경우가 많지만, 우리 집은 너무나도 평범한 가정이었다. 언론사 계열에서 일을 하시던 아버지와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하던 어머니, 그리고 두 살 차이의 여동생. 이게 우리 가족이었다. 그 중에서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사고 뭉치에 산만하던 아이였고 어머니는 그 혈기를 감당하기에 무척이나 힘들어하셨다. 자존감은 낮았지만 자존심은 세었고, 힘이 약해 친구들이 나를 괴롭히기 일쑤였다. 초등학교 때는 부모님이 사준 닌텐도 게임기를 빼았겨 보기도, 중학교 때는 한참 유행하던 레슬링 선수 언더테이커의 '초크 슬렘'을 맨날 당해주다가 골반 뼈가 나가 본 적도 있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정말 약과였다. 


내 인생의 가장 큰 터닝 포인트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우리 고등학교는 공학이었지만 남자와 여자가 분반이라 남자 반, 여자 반이 따로 있었는데 입학 후 여느 학교가 그렇듯이 남자 반끼리는 서열정리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나는 생긴 것도 세게 생겼고 자존심고 무척 강한 편이라 (싸움은 그 와중에 정말 못했다.) 노는 친구들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 한 번 감고 자존심 굽히고 서열 정리를 당해줄 법도 한데 나는 무슨 이유에서 인지 그런 친구들에게 더 화를 나게 하거나 눈엣가시같은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 후 나는 3일동안 평생 볼 피는 다 본 것 같다. 3명의 친구들은 무차별 적으로 나를 때리기 시작했고 학교 화장실의 바닥은 모두 내 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이렇게 피를 많이 흘려도 죽지는 않구나를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나는 그 뒤로 피를 잘 보지 못했고 코피를 흘리는 친구를 보면 그 때 생각이 나서 손이 떨리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성인이 된 이후로 이런 얘기를 한 번도 친구들에게 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면 나는 보여주는게 정말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남들 눈치보고, 남들 시선 의식하고 남 눈에만 사는 인생이 내 전부였다. '나'로서의 삶이 전혀 없었다. 돈이 없어도 여자친구 앞에서 돈 없는 모습은 죽어도 보이기 싫었고, 싸움을 못해도 시비가 붙으면 친구들 앞에서 주눅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난 이런 트라우마를 갖고도 남들에게 티 한 번 못내보고 살았었다.


그래서 나는 성공을 하지 못하면 안되는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친구들 보다 못 살면 정말 슬플 것 같았다. 너무 화가 날 것 같았다. 나를 가혹하게 채찍질하고 남들보다 한 발 앞서야만 했다. 그렇지 못한 삶은 지옥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년간 나에게 상처를 줬다고 생각하고 정말 미워하던 한 친구가 연락이 왔다. 동네 친구니까 소주 한 잔 하자고.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친구가 '나에게 이런 상처를 줘 놓고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나에게 연락을 한거지?'라는 생각을 하며 무슨 말을 하든 너가 나에게 이런 상처를 줘 놓고는 나에게 무슨 낯짝으로 연락을 하였느냐라고 물어볼 심산으로 술 자리를 나갔다.


결론부터 말을 하자면 나는 이 자리에서 사과를 받기는 커녕 부끄러움과 내 자신에 대한 자책감만 얻고 왔다. 이 친구가 술을 먹으며 비즈니스적인 얘기를 하다가 술이 두 세병 들어갔을 쯤 이런 말을 꺼냈다. "야 인행아 너 초등학교 때 나한테 왜 그랬냐. 나 진짜 그 때 많이 힘들었는데. 그래서 너한테 그런 감정을 갖고 있었던 거야." 나는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얼얼해 그 뒤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미안하다는 말만 연거푸 했던 것 같다.


나는 대체 지금까지 누굴 원망 할 자격이 있었으며, 대체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 보여주는 인생을 살았던 것인가. 참으로 허망하고 그저 내 인생이 나를 위해서 했던 합리화의 한 과정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과거의 나만 제일 불쌍하다고, 내가 했던 많은 나쁜 짓들은 다 잊어버린 채 내가 당한 일들만 생각했던 것이다. 이 친구 덕분에 나는 행복의 기준을 조금씩 바꿔가기 시작했다.


과거의 상처보단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껴보려고 한다. 돈을 버는 이유는 보여주기 위하여 버는 것이 아닌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그랬듯 내 미래의 행복한 가정을 위하여, 내 와이프에게는 세상을 보여주고 좋아하는 꽃을 선물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내 아들 딸이 하고 싶어하는 것은 마음아파 하지 않고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내 행복관으로 변화하였다.


아침에 외제차의 배기음을 들으며 출근하는 것,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 사는 것도 정말 매력적이지만 나는 와이프와 직접 커피를 내리며 커피 향에 대해서 얘기하고 이번 주는 뭘 할지, 어떤 영화를 볼지 고민하며 살 수 있는 삶이 더 행복할 것 같다.


나는 이제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된다. 성공하지 못해도 좋다. 조금은 내려놓고자 한다. 24살의 나에게 이만하면 열심히 살았다고, 네가 좋아했던 누군가들을 행복하게 해주기에는 충분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며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라고 말을 해주고 싶다. 앞으로 나는 행복하게 살 것 이다.


20대의 행복은 뭘까라고 생각해보니 내 친구들은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 좋은 여자 친구를 만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뭐 이리 거창하게 적어내린지 모르겠다. 30대에 내가 이 글을 읽었을 때 참 부끄럽겠지. 30살에는 모든 것을 다 줘도 아깝지 않은 사람과 결혼을 위한 연애가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과의 연애를 하는 네가 되길 바란다. 네 아픔과 행복을 모두 공유할 수 있는 사람과 네가 만든 카페에서 행복하게 일요일 아침을 맞이하길.


+ 앞으로는 창업관련 글도 많이 적어 볼 예정입니다. 제 감정의 쓰레기통 브런치를 한 분이든 두 분이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