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열심히 글을 쓸 때는 그랬다. 짧은 순간, 미세한 느낌이 스치면 그 꼬리를 붙잡아 도망가지 못하게 얼른 잡아두었다. 휴대폰 메모장이라도 열었다. 그 느낌이라는 녀석은 화장솜에 묻힌 스킨처럼 휘발되기 쉽고, 금세 흔적도 없이 말라버리기 일쑤니까.
그렇게 붙잡은 녀석들로 아침저녁 부지런히 글을 썼다. 뭐라도 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차곡차곡 글이 쌓였다.
한 작가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글 쓰는 걸 업으로 하다가 2년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쓰지 않으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했는데, 막상 쓰지 않고 보니 그 시간이 그렇게 ‘짜릿’했단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나도 비슷한 마음이니까.
조정래 작가의 책 제목처럼 작가들은 ‘황홀한 글 감옥'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이게 아니면 살 수 없다 믿으며 스스로를 가두지만, 쓰지 않고 산다면 훨씬 자유로울 수 있을지도... ‘쓰고 싶다’는 욕구를 품는다는 건 ‘써야 한다’는 중압감을 떠안는 일이기도 하니까...
요즘 글을 거의 쓰지 않았다. “왜 요즘 안 쓰냐”는 물음에 “요즘 내가 살만한가 보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글 감옥에서 탈출했던 셈이다. 쓰지 않아도 됐다. 다시 직장에 나가 일을 하고 있으니 일단 나의 쓸모는 명확히 증명이 되니까.
써야지 생각은 했지만, 쓰기 위해서 들여야 할 시간과 노력을 헤아리면, 쓸 마음이 사라졌다. 좋은 책들은 널리고 널렸으니까. 그런 글들을 ‘읽는 게’ 훨씬 쉽고 편안했다.
‘쓰고 싶다’ 보다는 ‘써야 한다’는 감각이 그동안 내 몸을 책상 앞에 앉히는 주요한 동력이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공부도, 돈벌이도, 육아도...) ‘써야 한다’가 사라지니, ‘쓰고 싶다’는 미약한 목소리는 너무 쉽게 묻혔다. ‘안 쓰니 짜릿한 시간’이 나에게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쓰는 짜릿함’을 만났다. 서점에서.
에세이는 웬만하면 사지 않고 빌려보는 편이다. 금방 읽히고, 다시 읽는 일은 드무니까. 그러나 이 신간 소식에 도서관에 책이 들어오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를 워낙 인상 깊게 읽어 황보름 작가의 신간 소식을 접하자마자 읽고 싶었다. 제목도 <단순 생활자>라니. 이건 사야 해 ㅎㅎ
‘이달의 신간’ 코너에 당당하게 자리한 책을 구입하고, 비치된 의자에 앉았다. 표지를 넘기니 간결한 문장이 맞이했다.
단 한 시간이라도, 단 하루라도 가벼운 상태가 되는 것. 이 상태에서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닌 내가 좋아하거나 하고 나면 기분 좋은 일을 하는 것. 이것이 내가 찾은 휴식이었다
문득 어떤 느낌이 스쳤다. 붙잡고 싶었다. 몸속으로 미약하게 흐르고 있던 ‘쓰고 싶다’는 파동이 이 책의 주파수와 공명했기 때문일까, 파동은 극적으로 증폭되었다. 휴대폰을 꺼내 오랜만에 글쓰기 창을 열었다. 휴대폰 자판으로나마 떠오르는 생각을 옮겼다. 그래서 이 글을 쓸 수 있었다. 늦가을 절간처럼 적막하던 블로그와 브런치에 군불을 넣을 수 있었다.
금방 꺼져버릴 성냥 한 개비처럼, 한 편의 글에 그칠 수도 있지만. 뭐 어떤가. 무엇 무엇을 위해 ‘써야 한다’가 아닌 그냥 ‘쓰고 싶다’가 불러온 글은 그 자체로 반겨 맞아 마땅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