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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Jul 21. 2018

을지로는 레드와인

난 酒路 여기를 가 - #2. 을지路

 이제 와인은 어렵고 비싼 술이 아니다. 마트나 편의점에서는 쉽게 살 수 있겠는데 막상 밖에서 먹어야 할 때면 가볍지 않은 가격 때문에 망설여진다. 그렇다고 강남역 골목에 있는 '한 병에 15,000원' 간판의 조잡한 와인집은 가기 싫다. 적당한 인테리어에, 민망하지 않을 정도로 싸거나 비싸지 않고 또 안주도 맛있는 곳 정도는 가야겠다 싶으면 '을지로'로 가면 된다. 이젠 편의점에서 와인도 4병에 만원인 시대가 오는데 쉽게 즐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대학에서 지리를 전공했다. 전공수업 중 서울을 '路'로 구분해서 공부한 적이 있다. 종로, 테헤란로, 을지로 등.. 둥근 개념의 지역이 아닌 수평선상의 관점으로 지역을 볼 수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 길을 따라 카페도 가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신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서울의 길(路) 그 위에서 마셨던 술(酒)을 꼭지로 연재물-'난 주로(酒路) 여기를 가'- 를 쓰기로 했다. 모두가 다 알고 있거나 아무도 몰랐던 길에서 즐길 수 있는 쉬운 술과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다. 어느덧 두 번째路는 바로 '을지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어느 순간 을지로에 특화된 술은 와인이 되었다. 본래 을지로는 을지오뎅을 필두로 소주를, 만선호프와 을지비어를 필두로 여름이면 한국의 옥토버페스트를 자처하는 골목엔 맥주가 대세였다. 그런 을지로에 '힙한' 와인집이 생기기 시작했다. 스산한 골목에 기존 건물 모습을 그대로 살린 와인집들은 골목골목 찾아오는 재미를 시작으로 적당한 가격과 좋은 음악, 분위기를 갖추며 을지로의 새로운 주류 패러다임을 펼치고 있다. 확실히 골뱅이집들은 이기고 있는 것 같다. 



십분의일(10분의1)


 

 십분의일은 소개가 무색할 만큼 을지로 와인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10명의 동업자가 수입을 나눠가진다 하여 십분의일이라고 한다. 처음에 이 집을 찾아갈 땐 무서워서 중간에 골뱅이나 먹으러 갈까 했었다. 아무도 없는 인쇄골목 안 철문을 열고 들어가 2층을 여는 순간, 안도감과 기대감으로 환해졌던 기억이 난다. 이 곳은 오픈 초창기에 친오빠와 처음 찾았다. 오랜 취준생활 끝에 모 은행에 합격한 오빠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 그래서 유독 이곳은 내게 기분 좋은 공간이다. 십분의일은 와인리스트가 다양하진 않지만 가격은 레드/화이트 동일하게 병당 29000 ~ 49000원 선이다. 특이한 안주로는 짜계치(짜파게티 위 계란과 치즈) 가 있다. 안주 가격이 저렴한 대신 솔직히 양은 적은 편. 단점으로는 너무 핫해져서 웨이팅이 길고, 12시면 문을 닫는다. 




 사색



 이상하게 을지로 와인집들의 컨셉은 대게 비슷하다. 어두운 조명 복고풍의 소파. 큰 샹들리에가 포인트인 사색은 최근의 생긴 곳으로 꽤 규모가 크다. 와인리스트가 십분의일보다는 다양하다. 가격은 3만 원 대. 개인적으로 너무 현대미술적인 느낌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 곳 저녁 타임에 있는 공연은 괜찮았다. 공연이라고는 하나 약 4-5분 정도 음악에 맞추어 남성 댄서가 독무를 한다. 뜬금없지만 당구장이 있는 을지로 건물 3층에서 와인을 마시며 감상하기엔 감사할 따름이다. 늦은 오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 주변 상인들이 모임을 하고 있었다. 을지로 상인들도 모임을 하는 와인집이라 괜히 신뢰감이 높아졌다. 만선호프와 거리도 가까워 만선호프를 갔다 사색을 갈지 그 반대로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곳.




 이 외에도 루프탑 와인바를 비롯해 다양한 와인바들이 을지로 골목 곳곳에 생겨나고 있다. 소주와 맥주를 마시다 한 템포 쉬어가자며 와인을 마시곤 하는데 그럴 땐 항상 만취한다. 다음날 숙취를 생각하면 만만하게 볼 술이 아닌데 이상하게 을지로에서 마시는 와인은 그 문턱이 낮다. 을지로에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식당인 '산수갑산'이 있다. 최자가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 산수갑산 순대 간과 편의점에서 산 옐로테일 레드와인을 함께 먹어보는 것이 나의 을지로에서 꿈이다. 을지로와 와인, 그중에서도 을지로는 레드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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