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 <우리집> (2019)
한국어에서 '집'이란 단어는 여러 가지를 함의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는 "사람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라는 뜻과 "가정을 이루고 생활하는 집안"이라는 뜻이다. 영어로 전자는 'house'로, 후자는 'home'으로 해석된다. 그런 점에서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은 (비록 영문명은 "The House of Us"이지만) 'home'과 'house'를 모두 함의하고 있는 제목이다.
다른 집안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이는 일반적인 4인 가족인 하나네는 바람 잘 날이 없다. 맞벌이하는 부모는 바쁜 나날로 집안에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고 있으며, 부부간에 다툼은 날로 늘어간다. 오빠는 사춘기에다 여자친구가 생기면서 집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다. 형태만 유지할 뿐이지 제대로 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가족을 보며 하나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커진다. 이에 하나는 밥이나 여행이라는 나름의 해결책을 고집하며 가족의 해체를 막으려 노력한다.
한편, 부모로부터 방치된 삶을 사는 유미와 유진은 사는 집에서 영문도 모른 채 쫓겨날 신세가 된다. 제대로 된 가족의 형태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유미와 유진에게 옥탑방이란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공간이다. 그 공간을 잃게 될 두려움에 유미는 여러 방법을 강구하지만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결국 영화는 하나네 "집"과 유미네 "집"을 지키기 위해 세 아이가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아이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를 맞이하고 가족에 편입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가족과 부모에 따라 삶이 좌지우지된다. 아이들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끊임없이 구속되고 끌려가게 된다. 그 타자성이 미성년자에게는 책임이라는 부담에서 보호해주고 얽매이지 않도록 하는 바운더리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 타자성이 미성년자에게는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도록 하는 폭력에 휩쓸리게 한다. 하나와 유미, 유진은 자신들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부모의 행동으로 인해 끊임없이 두려움과 불안함 속에서 허덕인다. "집"이라는 바운더리를 지키려는 아이들의 투쟁은 결국 타자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윤가은 감독은 지난 작이었던 <우리들>과 최근작인 <우리집>을 통해 많은 감독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아이들의 관점, 아이들의 세계에 초점을 맞춘다. 지난번엔 아이들의 복잡미묘한 감정과 관계에 집중했고, 이번엔 어른의 세계에서 휩쓸리는 아이들의 세계에 집중했다. 윤가은 감독의 두 작품은 모두 아이들의 관점에서 아이들에게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이어간다. 일반적인 아동/청소년 서사가 종결부에서는 결국 성인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하곤 하는데, 윤가은 감독은 현실이라는 어른의 관점을 적절히 배양하여 현실성을 유지하면서도 아이들의 순수함을 극의 마지막까지 힘있게 밀어붙인다. 비슷한 아이들의 이야기처럼 보여도 윤가은 감독의 이야기가 특히 두드러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