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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일리 May 13. 2023

뱉어내고 싶은 마음

일기를 왜 쓰냐고 물으시면

약 20년간 일기를 써왔다. 시작은 기억나지 않는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일기도 있는 것을 보면 거의 문장으로 내 생각을 표현하기 시작한 나이부터였던 것 같다. 처음에는 엄마가, 그다음에는 학교에서 시켜서 쓰기 시작한 일기였지만 유달리 다른 친구들보다는 일기 쓰는 것에 거부감이 없기는 했다. 그 덕분에 더 이상 일기 검사를 하지 않던 중학교 시절에도 혼자 다이어리를 쓰고는 했고, 고등학교 때에도 종종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메모장에 일기를 썼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자주 쓰지는 못했지만 힘든 날에는 꼭 일기를 썼다. 그리고 다시 작년부터 일기를 초등학생 때 못지않게 열심히 쓰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주변에 일기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뿌듯하게 말하고 다닌다. 그러다 보니 문득 누가 시키지 않아도 왜 일기를 쓰는 걸까 스스로 궁금해졌다. 쓸 때에는 별생각 없이 써도 나중에 일기를 다시 읽어보며 '이런 생각을 했었다니!'하고 놀라는 것도 좋고 일기를 쓰면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일기를 쓸 때의 고요함도 좋다. 그렇지만 일기의 수많은 매력을 차치하고, 꾸준함과 거리가 먼 내가 일기를 지금까지 쓸 수 있었던 건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인 것 같다. 일기가 좋기도 하지만 그만두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기를 써왔다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생 때인가 어딘가에서 '토하듯이 글을 쓴다'라는 표현을 본 적이 있다. 무슨 내용의 글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떤 글은 작가가 그냥 토해낼 수밖에 없어서 탄생한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 글은 다듬어져야 하지만 자신도 어쩌지 못하고 내뱉어진 '토고'가 있다는 말이었다. 나도 이렇게 일기를 토하듯이 쓴다. 돌이켜보면 어떤 일을 겪거나, 복잡한 감정이 느껴질 때 어찌하지 못하고 일기를 아무 생각 없이 써 내려가고는 했다. 특히 힘들 때 밤에 앉아서 감정을 일기장에 토해내며 울고 나면 기분이 나아졌다. 슬프고 힘이 들 때 그렇게 토해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일기를 썼나 보다. 일기는 어디에도 보여줄 필요가 없고 맞춤법도 맥락도 논리도 없이 써도 된다. 그래서 일기장이 내게는 감정을 토해내는 가장 좋은 곳이었다.


글도 내게 비슷한 의미다. 일기와 다르게 누군가에게 읽히는 글은 다듬어져야 하지만 그 본질은 뱉어내고 싶은 어떤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 나 자신도 모르게 인상 깊었던 일이나 순간, 감정이 삐죽 튀어나오는 순간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게 아닐까. 뱉어낼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항상 시작점이 된다.


사실 모든 창작 활동은 이러한 마음으로 시작되는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은 대학 시절 오대산에 등산을 갔다가 주차장에 세워져있는 고속버스가 흔들리는 것을 봤다고 한다. 놀라서 들여다보니 아주머니들이 그 안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고 한다. 다들 정차된 버스가 흔들릴 정도로 흥에 겨워 춤을 추고 있던 것이다. 솔직히 좀 추하다고 생각했지만 왜인지 마음에 오래 남았던 이 장면은 영화 <마더>의 엔딩 장면이 된다. 그래서 그에게 영화는 인상 깊었던 이미지를 오랜 시간에 걸쳐 빼내는 작업 같다고 했다. 결국 마음속에 얹힌 것처럼 남아 있는 장면이나 이야기를 숙련된 방식으로 뱉어내는 것이 예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내가 숙련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예술가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토해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이야기가 있는 한 나는 일기를 쓰고, 뱉어내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한 글을 쓸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 찾아보니 김연수 작가가 토가 나올 때까지 글을 고치고 또 고친다는 뜻에서 '토고'라는 표현을 썼다고 하는데 이게 '토고'의 뜻이라면 완전히 단어의 뜻을 잘못 해석한 것이지만.. 하하 내가 생각하는 정의는 다를 수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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