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훈 Dec 23. 2022

당연해서 당연하지 않은 것

'눈 먼자들의 도시'를 읽고

0.


  '눈 먼 자들의 도시'라는 강렬한 제목에서 장님들의 세상에선 외눈박이가 왕이라는 역설적인 격언이 떠올랐다 - 그리고 실제로 왕이 된 자를 보게 된다 -.


  인간은 후천적으로 발달하거나 퇴행하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일정 범위의 감각을 갖추고 태어난다. 물론 그것도 스스로가 일반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일반인의 일반화 오류일지 모르겠지만. 신체의 오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시각이 마비된 자들의 도시라니, 인류 문명 뿐 아니라 모든 동물들의 삶에 근간을 이루는 시각이 어두워진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일까.


1.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멀어버리는 사람들. 원인불명, 정체불명의 무조건적인 백색의 공포 - 이건 마치 어디에서 어떻게 걸렸는지 모르는 그 전염병 같다 -.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사람들의 혼란 속에서 확실한 사실 한 가지. 눈 먼 자들과 접촉하면 눈이 먼다는 것. 대책이 없는 전염병의 경우 격리만이 우선적인 해답이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알고는 있지만, 그 전염병은 잔혹하게도 모두를 덮치며 모든 것을 앗아간다.


  격리시키는 자도 격리 당한 자도, 누구하나 한 치 앞을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백색의 혼돈 속에 눈이 멀지 않은 단 한 명. 물론 본인도 시한부 시각일 거라 자각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에게 남은 유일한 시각은 계속해서 유지되며 보지 못할 것, 보지 않아도 될 것까지 보게 된다 - 이 부분에서는 보아야 될 것을 보지 못하고, 보지 않아야 할 것을 보게 되는 오이디푸스의 슬픈 역설이 떠오른다-.


  오이디푸스 일화에서는 단지 그가 본인의 눈을 찌르는 것으로 비극이 마무리되지만, 이 백색의 도시는 그러하지 못했다. 본래부터 시각을 가지지 못한 장님쥐들은 퇴화한 눈으로도 살아낼 수 있는 생존전략을 지니지만, 시각을 잃어버린 인간은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할 수 없는 연약한 동물에 불과하기에, 자연의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될 뿐만 아니라 눈 먼 자들끼리 스스로 생존경쟁을 해야 하는 비극의 연속선에 놓이고 만다. 불행히도 그 와중에도 총기로 대표되는 폭력성에 의해 계급은 발생하며, 본능에 충실한 욕구 실현 - 특히 성욕 - 까지 '리바이어던'에서 언급한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그대로 실현되고 만다.


  극복 불가능해보이는 불행에 절망하고 포기하고 분노하던 인간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생물체로서의 근원적인 생존욕뿐이다. 잠시 멈추는 순간 모든 것이 그대로 멈춰버리는 설국열차처럼,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지만 한 곳에 머물 수 없다는 것만은 알고 있는 이들에게 남겨진 건 오직 두 개의 눈, 그리고 절대적인 신뢰뿐. 눈 먼 자들에게 있어 유일하게 남은 시각을 가진 자는 마치 홍해를 가르고 지나가는 모세와 같달까.


  그리고 혼돈의 카오스를 거쳐 출애굽을 한 끝에 부지불식 간에 닥쳐왔던 백색의 공포는 시작과 같은 말로 걷히게 된다.


2. 


  최소한의 통찰력을 갖추었을 때 우리는 "눈을 뜬다"라고 표현하기에, 눈을 뜬다라는 것은 단지 시각의 확보에 그치지 않는다. 시각을 갖춘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행위일 뿐이라 그 중요함을 모르고 사는 것이 아니었을까. '작은 죽음'이라 불리는 잠에 들고, 깨어나는 행위가 단지 눈을 감고 뜨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 데도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는 모두가 수상한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