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
1.여유로운 기상
시차적응이 다 된걸까, 아니면 쉬지 않고 걸은 며칠의 피로가 누적된 걸까, 아니면 약수로 명현현상이 일어난 걸까. 눈 떠보니 7시가 넘었다. 한국 시간으로는 오후 3시. 한참 활동할 시간이니 지구 반대편에 소소한 안부를 전한다.
아무래도 채소를 계속 안 줄 심산인 것 같아 과일 위주의 식단으로 바꾸어 보았다. 맛이 우리나라랑 비슷해서 다행이다.
숙소에서 짐을 눌러 싸고, 빈 술병과 추억들을 남긴 채 체크아웃. 돈 조반니, 데꾸.
2. 이동
프라하에 온 후 하루에 서너번씩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지만 시내를 벗어나 종점까지 이동하긴 처음이다. 필스너투어를 가기 위하여 마이리얼트립 통해 신청했더니 가이드 산슬씨가 - 김씨다 - 종점으로 오라길래 부랴부랴 길을 나섰고, 일행들과 짧은 인사를 나눈 후 고속버스에 탑승했다.
한 커플과 일행인지 일행이 된 건지 모르겠는 여자 둘. 어제 다른 투어도 함께 해서 다들 면이 있는 것 같다. 오랜만에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는 일행이 생겼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친해져서 투어 후 꼴레뇨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해야겠다.
키보드 케이스는 올 해 구비한 IT 기기 중 단연 만족도 최상이다. 시험 끝나면 사려다가 차일피일 미루며 잊고 있었는데 당근에서 사용감 많은 제품을 만원에 득. 언제 고장나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케이스의 허물이 벗겨지지만 노트북보다 휴대하기 훨씬 용이하여 식당, 비행기, 기차나 버스 어디에서든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게 되니 채산성 최고다. 부디 일주일만 버텨다오.
3. 필스너 투어
맥주의 나라 체코에 왔으니 마시기에 그칠 수 는 없으렸다. 필스너의 고장 플젠은 프라하에서 버스 또는 기차로 한 시간을 가야 한다. 투어가 시작되기 전 시간이 남아 맥주 한 잔. 역시 맥주 투어답다.
역시 혼술보다는 같이 마셔야 맛있다. 3일을 점심 저녁으로 혼술했으니 체코의 술 문화에 대해서는 알 리가 만무. 체코어로 건배는 “나즈드라비” 라고 하며, 이 때 시선은 맥주잔이 아닌 서로의 눈을 보며 해야 한다. “당신의 건강을 빈다,”는 인사라고 하니 역시 건강을 위해 더 마셔야겠다.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 받으며 맥주의 제조 과정, 체코 맥주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대체 체코는 맥주가 왜 이렇게 싸느냐, 주세가 낮느냐라는 질문에 가이드왈 체코에서 맥주는 “Liquid bread” 란다. 액체 빵이라니, 단순하지만 적확한 표현이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배고프던 시절 막걸리로 곯은 배를 채우던 것과 비슷하달까. 물론 이제는 그러지 않겠지만 그런 문화가 오늘 날까지 남아 있는 바, 주세를 올리려는 정책은 언제나 거센 반발을 야기하여 지금처럼 낮은 가격이 유지되고 있단다.
아사히 투어를 다녀온 일행에 따르면 보통의 맥주공장 투어는 현대화 된 시스템 따라 제조되는 과정을 보여주지, 필스너처럼 전통적인 생산 과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고 한다. 물론 필스너나 코젤 모두 아사하에게 인수된 것은 일본 맥주를 끊은 내게도 인생의 회전목마겠지만.
좋은 보리를 선별하여 덖은 후 지하 100미터에서 암반수를 끌어올려 홉을 첨가하여 숙성 시키면 맥주가 된다는 게 대략적인 영어 설명. 산슬씨가 중간중간 첨언해 주었지만 어차피 맥주 공장에 견학을 간 것이 아니라 그저 구경 간 것이기 때문에 맥주를 소주로 만들었다고 해도 상관 없었다.
다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지하 셀러에서 바로 받아 먹는 생필스너! 발효가 덜 된 상태의 맥주를 그대로 맛 볼 수 있는 기회는 양조장을 방문하지 않는 한 없을 것이기 때문에 잽싸게 한 잔 비운 후 한 잔 더 달라고 했다. 나즈드라비.
기대가 커서였을까. 비룡이 미미하고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맛은 아니다. 오히려 발효 과정에서 탄산이 어느 정도 첨가된 생필스너와 비교하였을 때 어느 것을 고르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후자. 그래도 흔치 않은 기회를 경험해본 것으로 충분허다.
투어 전에 맥주를 마신 관계로 투어 후 예정되어 있던 식사는 생략. 일행들이 스테이크를 묵는다길래 좋다고 낀다고 했다. 이 얼마만의 농담을 주고 받을 기회란 말인가. 나즈드라비!
4. 스테이크 투어
일행들이 오라고 하는 스테이크 집으로 향하니 현지인들로 바글바글. 서서 먹는 바가 있는 테이블에서는 마스크 벗는 순간 코로나 확진 될 것 같아 걱정했는데 한참을 기다리다 다행히 그나마 인적이 드문 테이블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깐띠나라고 하는 정육식당인데 고기를 고르면 스테이크로 구워주거나 육회로 내주고 다양한 맥주와 마리아주를 꾸며준다. 나를 제외하고는 인스타를 열심히 하는지 다들 알고 있더라. 꼭 와보고 싶던 집이라길래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마스크를 쓴 채 기다렸다.
스테이크를 그닥 즐기는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기가 좋고 잘 구워서인지 육즙이 한가득인지라, 소금 간으로 충분한 풍미를 내뿜었다. 소주를 절로 부르는 맛이었지만 없으니 코젤로 헛헛한 마음을 달래기로 한다.
잘 다진 육회는 잘 구운 바게뜨 위에 올려 먹는데, 바게뜨에 살짝 구운 마늘을 직접 들고 칠해서 마늘 바게뜨를 만들더라. 파주 가면 저렇게 안 해도 잘만 만들던데.
여행지에서 만남은 적어도 “여행”이라는 공통 관심사가 있기 때문에 대화가 수월하다. 게다가 서로 준거집단이 아닌 타지에서 만나 오늘 밤은 친해도 내일이면 모를 사이이기 때문에 편한 것도 있을 거고.
신혼부부는 둘 다 퇴사한 김에 50일의 유럽 여행을 가고자 지난 주에 프라하에 도착했다고 하고, 친구인 둘은 여차저차 오스트리아를 거쳐 프라하에 도착했다고 했다. 정보를 주고 받으며 - 물론 정작 필요한 세탁에 관한 정보는 별로 얻지 못했으나 - 나즈드라비하고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며 안녕!
오늘은 친해도 내일이면 모를 사이인 것이 여행지의 인연인 것이니께.
그래도 산슬씨 덕분에 체코 현지 얘기도 많이 듣고, 우리나라 체크카드로 현지 atm기에서 코루나를 인출할 수 있다는 것도 배우고, 당장 수건이 없는 형편에 살 만한 매장 정보도 얻었다. 스포츠 타월이 우리 돈으로 6,500원. 이쯤 되면 싼 것은 맥주뿐 인 것 같고, 물가가 싸다는 것은 서유럽에 비한 것이 아닌가 싶다.
5-1. 빨래
일행들과 헤어지고 숙소 앞 마트에서 액체 빵을 두어 개 챙겨 들어왔다. 나는 아직 배고프니까.
사실 신혼부부가 투어에서 처음 보자마자 내일 일정 없으면 체스키 크롬노프에 같이 가자길래, 혼자 심심하던 차에 옳다구나 싶어 그러자고 했다. 비록 지구 반대편의 부인은 설마 신혼부부가 모르는 사람이 끼는 걸 좋아하겠냐며 끼지 말라 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함께 가는 입장에서 열심히 사진 찍어주려 했건만, 일정 문제로 같이 못가겠단다. 아쉽군. 그렇다면 내일은 일요일이니 나도 쉬엄쉬엄해야겠다. 긴 여행에서나 누릴 수 있는 여유이니까.
빨래를 해야겠어요. 오후엔 비가 올까요.
비는 아니 오겠지만 남은 양말과 속옷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