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_보이후드
10년 뒤에 뭐 하고 있을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질문에 10년 전에도 이 질문을 했었다며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나를 자조했다. 그리고 10년 뒤에도 똑같이 별거 없다고 웃고 있지 않을까라며 진담 반 농담 반 섞어 웃어넘겼다. 웃음 뒤에 찾아온 씁쓸한 감정이 별안간 마음을 삼켰다. 뭐라도 되어 있을 줄 알았지, 20대 후반이면. 애꿎은 빨대로 커피만 휘젓다 시원하게 커피를 들이켜고 얼음을 씹었다.
인생이 프라모델 같은 조립품이라고 생각한 걸까. 20대가 거의 다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플라스틱 부품들이 뜯겨 조립되지 못한 채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방 안의 광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나는 설명서를 이리저리 뜯어보며 조립하고자 하지만, 쉽지 않다. 방안 속 어린 나는 금세 울 것만 같은 표정이다. 10년 뒤의 나를 만들고 싶은데 마음처럼 조립되지 않는 나는 멍하니 하늘을 응시한다. 누군가 자신을 안아주길 기다리는 듯.
뒤돌아보면 뭘 한 건지 싶은 허무한 순간들이 많다. 그럴 때면 나는 쓰면서 동시에 지워지는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잡고 싶지만 잡히지 않는 이야기. 아니,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인생이 우연과 만남들이 범벅이 되어 섞인 순간들의 총합일 뿐이라는 걸 깨달은 이상 미래를 '기대'하는 게 맞는지 아예 의심이 든다. 어렸을 때는 다음 날을 기대하며 잠이 들었는데. 프라모델의 멋진 완성품을 나도 만들 수 있다고 기대했었는데. 돌이켜 본 인생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 없을 때, 앞으로의 10년이 어떨지 그다지 궁금하지 않을 때 나는 이 장면을 떠올린다.
영화 보이후드는 텍사스 주에 사는 소년 메이슨 주니어(엘라 콜트레인)의 가족을 12년 일기를 그린다. 관객들은 2시간 반 동안 12년의 시간을 압축해서 체험하게 되는데 가족들의 외모가 시간의 풍파를 맞아 마모되는 만큼 우리의 마음도 마모되어 뭉클해진다. 위 장면은 메이슨 주니어의 엄마 퍼트리샤 아켓(올리비아 에반스)이 대학에 입학해 독립하고자 짐을 싸는 아들을 향해(혹은 자신을 향해) 담담히 말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 거야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결혼하고 애 낳고 이혼하면서!
네가 난독증일까 애 태웠던 일, 처음 자전거를 가르쳤던 추억...
그 뒤로 또 이혼하고 석사학위 따고 원하던 교수가 되고 사만다를 대학에 보내고 너도 대학 보내고...
이젠 뭐가 남았는지 알아? 내 장례식만 남았어!
두 시간 동안 퍼트리샤 아켓의 인생을 간접 체험한 관객은 그녀와 함께 울고 싶어 진다. 그녀의 인생은 파란만장이라는 단어로는 감히 형용할 수 없다. 그 단어는 퍼트리샤의 인생에 서려있을 발랄함 혹은 천진함을 과장하기 때문이다. 퍼트리샤의 인생에 그런 가벼움은 없다.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함과 인내심이 삶의 매 순간마다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있는 힘껏 살아간 사람 역시 저렇게 허무를 토하는데 가벼움을 이고 살아가는 일반인들의 삶이란. 금방 증발해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한 섞인 울음에서 역설적으로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한다. 잠시 멈춰서 돌아보는 것. 멈춰서 회고하고 순간을 음미하는 것. 그것만이 잠시 동안 날아갈 것 같은 삶을 붙잡아 준다. 퍼트리샤의 울음은 인생의 허무함을 자각하는 순간이 역설적으로 허무하게 흘러가는 순간을 잡아주는 중력의 순간이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고 새로운 도전을 감행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허무해질 것임을 알더라도.
허무해질 것임을 알더라도 나아가는 태도. 10년 뒤의 나를 생각하는 일이 의미 없다고 느껴져도, 10년 전의 내가 기대했던 모습이 아님을 인지하더라도, 삶이란 프라모델을 완성함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끼우고 맞추며 조립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허무하더라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니, 그 사실을 알기에 나아가야 한다. 허무함에 차오르는 눈물만이 우리의 인생을 잡아주는 묵직한 중력이니까.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내일을 향해 나아가고, 다시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는 일의 반복. 삶이 우리에게 준 가장 잔인하면서 아름다운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