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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재 Nov 15. 2021

인생을 살 준비

영화_소울

살아가는 것 그 자체를 위해


중국 작가 위화는 장편소설 '인생'의 머리말에 이런 말을 썼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살아가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미국의 민요 <톰 아저씨> 속 흑인 노예가 평생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지만 더없이 우호적인 태도로 세상을 대한 사실에 깊이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비슷한 이야기를 쓴다.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지만 더없이 우호적인 태도로 세상을 대하는 중국인의 이야기. 그 이야기가 바로 '인생'. 그는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고백한다.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기에.


위화가 자기를 이해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할 때 나는 그 말이 자기의 영혼에 닿으려 노력한다는 말로 이해했다. 글을 쓸 때 영혼에 조금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면 머리를 쓸 때와 마음을 쓸 때 두 가지가 있다고 느껴지는데 전자보다는 후자가 영혼을 위한 글쓰기에 가깝다. 이때 마음은 깊고 고요해진다. 나는 고요히 그 자리를 응시한다. 그 안에 있는 무언가가 그 모습 그대로 드러나길 기다린다. 그리고 물어본다. 지금 상태가 어떤지. '마음 챙김' 이란 이런 것이라 생각한다. 


비쩍 말라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영혼을 마주할 때, 나는 차라리 가슴을 쓸어내린다. 지금이라도 발견해서 다행이라고. 보통 이런 영혼은 일상생활과 범속한 세상만사에 휩쓸려 가려지기 일쑤다. 나는 죽어가는지도 모른 채 죽어간다. 내가 내 안의 나와 완전히 분리될 때 영혼은 완전히 죽는다. 영혼이 말라비틀어진 이유는 아무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그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조차도. 세상은 개인의 영혼을 가리는데 총력을 다하니까. 그래서 영혼을 살 찌우는 방법은 영혼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는 자가 있다고 여기는 영혼은 더 이상 외롭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쓰며 영혼을 어루만진다. 다시 나와 내 안의 나를 연결시킨다. 스스로와 화해한다. 태어날 때부터 있는 그대로의 영혼과. 깊은 우물에 묻혀 스러진 영혼을 마주한다. 물어본다. 대화한다. 괜찮냐고. 어떻게 이렇게 있을 생각을 했냐고. 어떻게 이런 곳에 있을 수 있냐고. 같이 올라가자고. 영혼과 깊게 연결될수록 동시에 넓게 연결되는 느낌이다.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라는 위화의 말에 공감한다. 영혼을 다루는 일은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쓸 때 스스로가 소중함을 깨닫는다.




인생을 살 준비가 되면 마지막 칸은 채워져

(영화 '소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소울 中>

영화 '소울'의 재즈 피아니스트 '조 가드너'는 한 번 더 삶을 살기 원한다.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꿈꿔왔던 도로시아 콰르텟과의 연주가 죽은 날 저녁에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의 바람을 실현시켜 줄 조력자는 지구에서 태어나는 것을 혐오하는 영혼 '22'. 자신의 지구행 티켓을 조 가드너에게 주면 그토록 혐오하는 지구에서 태어날 일도 없기 때문이다. 관건은 지구행 티켓을 만드는 것. 티켓의 마지막 칸 '불꽃(spark)'을 채워야 지구행 티켓이 완성되는데, '22'는 수억 년 동안 그 불꽃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영혼은 이제 지구에서 그 불꽃을 찾아본다.


조에게 불꽃이란 삶의 목적이다. 재즈 음악만 생각하면 그의 마음속에서 불꽃이 이니 그렇게 생각할 법도. 그래서 22에게 자신의 목적을 찾아보라 다그친다. 일련의 사건 사고들을 거쳐 어느새 22의 마지막 칸은 채워져 있는데, 무엇이 그 칸을 채웠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영혼들의 세계를 관장하는 '제리'에게 물어본다. 22의 목적은 무엇이냐고. 그러자 제리는 웃으며 말한다. 영혼의 목적? 그런 건 정해주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마지막 칸의 의미는 무엇일까. 영화는 명확하게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는데, 아마 그 자체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순간 그 의미 자체가 훼손되기 때문일 것이다. 조는 삶을 두려워하는 22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난 무서워 조, 난 자격 없어, 불꽃도 못 찾은걸.
아니, 찾았어. 불꽃은 목적이 아냐, 인생을 살 준비가 되면 마지막 칸은 채워져.


불꽃을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변화하는 자신을 얽매기 시작한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해. 나는 과학을 좋아하니까 이런 행동을 해야 해. 고정된 정체성을 고수하기 위해 스스로를 가린다. 가능성을 닫고 변화를 멈춘다. 분리되고 단일한 목적이 자신 자체라고 생각하는 순간 삶은 유연함과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나, 의무와 부담, 후회와 회한으로 얽매인 나가 내 정체성을 이룬다고 생각했다. 현재가 쪼그라든 채 과거와 미래를 사는 내가 나라고 믿었다. 그건 제한된 나였다. 넓은 하늘 속 먹구름만이 나라고 생각했다. 그 제한된 정체성이 나를 생각의 악순환으로 이끌었다. 걱정이 걱정을 낳고 불안이 불안을 낳고 무기력은 무기력을 낳았다. 감정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감정을 묻기 위해 더 강박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더 강박적으로 생각하면 더 불안해지고 결과는 뭐, 뻔하다.


그럴 때면 나는 저 대사를 되뇐다. 인생을 살 준비가 되었는지만 확인한다. 나를 규정하는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그 질문에만 답을 하면 머리가 맑아진다. 나는 무언가 되기 위한 존재가 아니다. 나는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수단이 아닌 목적이다. 제한되지 않은 영혼이 온전히 나를 이룬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각하는 것이다. 몸소 느끼는 것이다. 나는 무한한 가능성과 개방성과 관용과 존엄과 품위를 가진 소중한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나는 그렇게 점점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진실의 존재에게. 영혼을 마주한다는 건 그런 의미 아닐까. 인생을 살 준비는 이렇게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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