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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영 Nov 10. 2024

다시, 모놀리스

비계를 털어내니 모놀리스가 나타났다


“모놀리스 같은 공간이면 좋겠다.”


설계에 들어가기 전, 가장 먼저 모놀리스(monolith)를 떠올렸다. 왜 그랬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오는 모놀리스처럼 네모반듯한 집을 지어달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 조금은 그렇다. 여자 혼자 살 집이라 행인이든 도둑이든 ‘이게 집이야?’ 갸우뚱하며 입구도 못 찾고 되돌아갈 정도로 돌덩어리 하나 갖다 둔 것 같은 삭막하고 생경한 ‘집 같지 않은 집’을 원한 것이다.

정확한 이유를 찾기 위해 다시 설계 요청서를 들여다봤다. 2023년 5월. 벌써 1년 반 전의 글이라 문체마저 낯설다. 너무 정성을 꾹꾹 눌러 담아 쓴 나머지 자의식 과잉에 따른 다소 오글거림도 추가. 그래도 누구도 아닌 내가 쓴 글이라 당시의 생각은 충분히 이해된다.


‘정의되지 않은 공간’


맞다. 그랬지. 집이지만, 사무실이고, 공방이고, 동물 보호소이고, 응접실이고, 도서관이며, 비건 쿠킹 스튜디오이며, 연구실이기도 하고, 채소 농장이며, 요가원이나 명상원이고, 공연장이나, 영화관이 될 수도 있는. 뭐든 될 수 있는 텅 빈 뮤지엄.


근데 달리 말하면 그냥… 미래에 무엇을 하고 있을지, 이 집에서 뭘 하고 싶은지 확신이 없었던 것 아니었을까? 시간이 갈수록 미래는커녕 당장 내일 뭐 할지 계획하는 것조차 버겁다. 나 같은 계획형 인간의 단점은 계획은 잘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크게 좌절한다는 것. 그래서 콘센트를 어디에 넣을지, 조명을 어디에 달 건지. 지극히 사소하지만 한 번 정하면 바꾸기 힘든 것들을 결정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한번 묻으면 돌이킬 수 없는 콘크리트 주택이라 특히 더.


집이 완공을 바라보고 있지만 가구나 소품 쇼핑에는 관심이 없다. 이제 살 돈도 없지만 물건 고르는 게 이제는 제일 피곤하다. 책상, 매트리스, 개방석, 피아노. 이 외에는 놓을 물건도 딱히 없다. 꼭 필요한 것 외엔 아무것도 안 들이고 싶다. 35년간 끊임없이 바뀌는 갈대 취향에 내놓은 묘안은 무(無)다.


제법 모놀리스 같은데요.


신발 끄는 소리마저 두세 번 울려 퍼지는 높은 층고 아래 서면 이 공간의 ‘집 같지 않음’이 가장 잘 느껴진다. 이곳을 오갈 사람들과 동물들, 그들의 움직임이나 목소리도 상상할 수 있다. 집 같지 않지만, 단순히 집이 아니라서 가능한 모든 것들.


비계를 털어내자 제모습을 드러낸 건물. 돌덩어리 같은 회색 외관과 단조롭다 못해 창백하기까지 한 노출 콘크리트 내부. 그렇게 천천히 안팎을 오가며 둘러보니, 무엇이든 될 수 있는 확장의 모놀리스가 틀림없다. 정의되지 않은 이 텅 빈 덩어리 안팎에서 벌어질 유연한 미래가 오늘은 사뭇 더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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