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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Apr 29. 2024

한옥에 사는 헤밍웨이

한옥에 사는 헤밍웨이 에필로그


안녕하세요. 저는 실평수 17평 즈음되는 자그마한 한옥에 살고 있습니다. 마당에 분홍빛 배롱나무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백일홍)를 심은 지 이제 2년째인데 이제야 이곳 생활이 익숙해졌어요. 그런데 하루하루가 더 바쁜 건 왜일까요?     


나는 파리 덕후다. 언젠가 읽은 헤밍웨이의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eable feast>에 꽂혀 내 인생도 어디서든 축제 같기를, 화려하고 재미있고 가슴 뛰는 삶이 되길 바라며 파리 한 달 살기를 꿈꿨고 주기적으로 헤밍웨이의 책을 읽으며 다짐을 되새겼다. 그리고 마침내 꿈을 이뤘다. 파리에 머물며 헤밍웨이의 단골집이던 카페 라클로즈리 데릴라(La Closerie des Lilas)를 기웃거리고 책 속에서 헤밍웨이가 배회하던 파리의 거리를 따라 걷다가 마침내 실비아 비치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에 가서 영어로 된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구매해 에펠탑 아래 앉아 꿈을 읽었다. 어찌나 감격스러웠던지 책 표지에 손만 올린 채 단 한 장도 넘기지 못하고 에펠탑만 바라봤었다. 책 속에 나온 파리를 쏘다니며 대문호에게 얼마나 감사 인사를 보냈던가.

‘이제 내 삶도 어디서든 화려한 축제 같겠지.’



축제를 품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내 삶은 축제와 거리가 멀었다. 평범한 내게 평범한 시간이 흘러갔고 나는 셰익스피어 서점에서 산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헤밍웨이는 왜 블랙윙만 썼을까?     


한옥 공간을 리모델링하면서 어떤 생각과 사물로 채워야 할까 고민을 참 많이 했다. 공간은 ‘기록’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더 구체적으로는 ‘아날로그 아카이빙’이라는 최첨단 디지털 시대를 역행하는 테마로 이 지역에서 아니, 아마 한양을 가더라도 찾아볼 수 없는 콘셉트일 것이다.

“뭐 하는 곳인데요?”
“어... 기록하는 곳이요.”
“네?”

주인조차 한 문장으로 정리하지 못하는 한옥을 직설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상징적 존재를 찾아야 했다.
 

헤밍웨이는 살아생전 팔로미노 사의 연필 블랙윙 602로 작품을 집필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헤밍웨이뿐만 아니라 스타인벡, 번스타인 등 어마어마한 작가들이 블랙윙 602를 고집했다고 하는데 무생물 연필 한 자루에 이만한 영광이 또 있을까. 호기심이 일었다. 블랙윙 602를 당장 구매했고 매끈하고 세련된 디자인 덕분에 필기감이 좋지 않더라도 전시용으로 쓸만하다는 생각이 들던 와중 무심코 연필을 쥐고 ㄱ을 그리자마자 연필에 사과해야 했다. 

‘헤밍웨이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나는 옛날부터 연필이 좋았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에도 사물함에 쌓여있는 볼펜과 노트를 놔두고 굳이 커터칼을 꺼내 검지와 엄지손가락으로 단단히 중심축을 잡고 슥 – 슥 – 흑심을 둘러싼 나무를 벗겨내며 심신을 단련했고 깎여 나간 흔적이 내 오점이고 치부인양 후련했다. 연필은 마치 내 의도를 미리 읽고 매끄럽게 미끄러져 아름다운 기획안을 뚝딱 완성해 줄 것만 같았다.      


별 의미 없는 문장 몇 줄 끄적거리다가 당장 블랙윙 602 4 다스를 들여왔다. 그리고 본가로 연락해 내 책장에 있는 책을 전부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내 인생에 축제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책으로 가득 찬 종이상자 여섯 개가 도착했고 마당에 닥치는 대로 꺼내 놓고 책더미를 뒤져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찾아냈다. 얼마나 방치되어 있었으면 문고본 표지가 위로 들려 휘어있는 걸까. 


마당은 마치 축제 같았다. 손때 묻고 먼지 맞은 제각기 다른 크기의 책들이 이리저리 놓여있는 모습은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연상케 했고 마당은 과거로 소용돌이쳤다. 

‘세찬 돌풍이 불어 나를 지구 반대편으로 데려다 놓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파리로 날아가 거리를 거닐며 화려한 축제와 행운을 찾고 싶었다. 중고책을 판매하는 부키니스트 거리를 걸으면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곤 했는데 운이 좋다면 아주 드물게 소설의 초판본을 발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는 가판대를 아주 꼼꼼하게 훑어보기 시작했다. 역시나 헤밍웨이의 <날마다 축제는> 알라딘 중고서점의 해리포터 시리즈만큼이나 많았다. ‘축제’는 어디에나 있었다. 

‘어딜 가나 축제와 맞닥뜨리는 파리 산책이라니!’     


불현듯 내 호주머니에 든 축제가 만져졌다. 하나의 단단한 형태로 자리 잡고 내 옆에 붙어있었다. 누구나 주머니 속에 축제를 넣고 다니는데 발견하는 시기만 다른 게 아닐까? 무릇 축제란 매분매초 전율이 일고 흥분하며 입안에 넣기만 해도 혀가 아린 초콜릿 같은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축제는 맞춤형 양복을 입을 때 느껴지는 편안하고 안락한 착용감 같은 형태였다.


한옥에서 반복되는 익숙한 시간에 이미 스며든 나는 익숙한 공간에서 전에 없이 일관성을 띠며 살아 있다는 감각과 삶을 사랑한다는 믿음 하나로 활기 넘치는 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오픈 사인을 띄우고 나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세워 놓은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흘긋 바라보곤 손 가까이에 쌓아놓은 이면지와 블랙윙 602를 들고 마당으로 나선다. 헤밍웨이가 사는 한옥에서는 날마다 축제가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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