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창업가 시절 했던 것들을 PD가 된 지금도 하고 있길래.
*이 글은 6년 전 창업가 시절 했던 것들이 지금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생각에 쓴 글이며, 수필과 정보제공의 중간 쯤에 있는 짬짜면 같은 글입니다.
2020년 3월 27일.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 지 1년 6개월이 지난 무렵이다. 참고로 10대의 우창성은 직장인이 되어 서울에 살면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오랜만에 군 시절 일기장을 들춰본다. 감정적으로 슬프고 지친 나의 자존감을 붐업하기 위한 용도로, 더 슬픈 시절의 나를 보기 위해. (다소 creepy)
이 시절을 이렇게 암울하게 보냈구나.라는 생각들과 함께 위로받으며, 일기장을 더 넘긴다. 휴가 중 엄마와 처음으로 카페 갔던 날이 보인다. 그때 가장 유행하던 치즈가 들어간 음료를 '와방 hot한 음료'라며 너스레 떨던 나, 그리고 엄마의 어떤 말에 치즈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릴 뻔했던 나의 감정이 써져 있다.
"아들이랑 이런데 오니까 좋네."
이런 말들은 와방 hot한 치즈 음료를 이제야 사드린 나를 질책하면 된다.
"엄마가 예전부터 느낀 것인데, 엄마는 슬퍼." 왠지 긴장되는 이런 유형의 말들로 시작했다.
"아들은 엄마 몰래 어른이 된 것 같아서 슬퍼."로 끝났다.
'슬프다'와 같은 감정의 언어를 절대 쓰지 않아, 우리 엄마가 어쩌면 행복 언어 회로로 짜진 로봇일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
엄마가 나를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이유, 이제야 일병을 단 아들이 와방 hot한 치즈 음료를 먹으며 엄마에게 던진 창업에 대한 포부 때문이다.
"엄마. 나는 군대에서 보고 느낀 어떤 것들을 활용해서, 돈을 많이 벌 꺼야. 그래서 내가 등록금 낼 거고, 엄마 명품백도 사줄 거야."
22세 power군인이 보고 느낀 어떤 것에서 시작된 필름케이스 창업. 필름케이스 창업(그때)의 맞았던 것들, 그리고 그때가 있어 절실히 느끼는 '지금이 맞은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나는 투머치라이터다. 별로 궁금하지 않다면 지금 포기하는 것을 추천한다. 체류시간이 짧다면 내 자존감이 또 떨어질 테니까.
시작은 늘 닮아있다.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는 소중한 시선이 무언가를 만든다.
- 그때 | 일병 우탕텅, 유난히 하얀 인사병(왜 인사병들은 다 하얗지?)이 있는 행정실에 들어간다. 행정실에는 각종 서류들을 잘 보관하기 위한 OHP 필름 용지가 있었다. 내가 그린 그림을 조금 더 잘 보관하기 위해, 하얀 인사병에게 부탁해 투명한 OHP필름지로 코팅해달라고 부탁하곤 했었다. 이 OHP필름지를 보고 떠올랐다.
"까마득하지만(...) 전역이라는 것을 한다면. 이 소중한 얇은 용지로, 다양한 것을 표현할 수 있겠구나."
이 얇디얇은 용지가 그 시절 나에겐 매우 소중했다. 무엇을 만들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었다. 하지만, 이 얇디얇은 용지가 내 뇌리에 굵은 스파크를 남긴 것은 분명했다.
- 지금 |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PD로 일을 하며, 한 달에 약 20개의 브랜드를 만난다. 군 시절 OHP필름지를 만날 때처럼, 마음속에 진하게 세기는 무언가가 있다. 아무리 영세한, 시작점에 있는 브랜드라도. 이 브랜드를 허투루 보지 말자. 소중함으로 무장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더 소중한 이 브랜드의 잠재력이 보인다. 그 잠재력을 셀링포인트로 잡아 누군가에게 소개하는 것이 나에겐 매우 중요하니까.
행동이 없다면, 돈과 고객이 동행해주지 않더라.
- 그때 | 병장 우탕텅! 전역을 앞두고 말년휴가를 나갔다. 당시 아이폰6가 출시될 때라 바로 휴대폰부터 바꾼다. 전역날 '세련된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고, 인스타그램에 멋지게 올려야 하니까. 나 전역했다고. 이제 더 이상 꼬꼬마도 아니고, 정방향 설정 후 밝음 필터 처리한 사진을 올리는 세련된 20대 초반 남성임을 어필해야 하니까. 근데 또, 커스터마이징이라는 요상한 것이 유행이다. 그럼 내 세련된 아이폰을 커스터마이징 해야 한다. 근데 비싸서 칼로 긋거나 스티커를 붙이기에는 아깝다. 커스터마이징 케이스를 사자니 비싸다.
"그럼 케이스를 끼워야겠다."
이때 군 시절 내가 소중히 바라봤던 OHP필름지가 생각났다. 이 필름지에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칸마리라는 강아지의 이름을 인쇄했고, 투명케이스 안에 이 필름지를 끼웠다. 페이스북에 올렸다. 작은 아이디어였지만, 이 아이디어에 사람들이 반응했다.
"나도 만들어줘. 얼마야?"라는 질문을 받기 시작하였고, 행동했다.
필름케이스(canmary filmcase)라는 온라인 상점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돈이 나와 동행해주기 시작한다. 20만원의 군인월급을 받던 우탕텅 병장은 민간인이 되어, 통장에 100만원, 1,000만원(~)이라는 깜찍한 부를 쌓는다.
- 지금 |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PD로 일을 하다 보면, 분명한 어려움이 하나 있다. 이미 시중에 있는 제품이 아닌, 새로이 기획된 제품을 다뤄야 하니 어떠한 세팅이던 다소 늦을 수 있다. 그 세팅을 조금이나마 촘촘하게, 빠르게 하는 것은 나의 능력이다. 나의 능력 중에서도, 행동력으로 보여야 한다. 집요하게 묻는다.
"대표님, 그때 말씀해주신 그 제품은 얼마나 준비되었을까요? 이렇게 해보면 어떠세요?"
내가 먼저 행동해야 간절함이 소중함으로 비치고, 그 소중함에 응답해 나의 고객들에게 보일 수 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물음'이라는 행동을 해야 새로운 제품을 빠르고 바르게 소개하고, 매출로 보일 수 있었다.
그들이 내가 소속한 상점(플랫폼)이 아닌, 나를 찾게 하자.
- 그때 | 사회인 우탕텅! 어엿한 창업가로 성장했다. 고객들이 동행해준다고 해서 배가 부르면 안 된다. 내가 누군지 사진으로 보여주기 시작했고, '감사합니다'혹은 '고맙습니다'라는 짧은 손글씨로 작은 정성을 보였다. 온라인 마켓을 보니, 사탕도 챙겨주길래 사탕도 넣어봤다. 직접 그린 그림을 스티커 형태로 만들어서, 고객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내 상점을 찾아와 주는 단골 고객들이 생겼고, 직접 움직여 홍보해주는 FAN들이 생겼다. 필름케이스를 사지 않더라도, 소통하길 원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제품 사는 것뿐만 아니라, 나를 즐거워해 준다. 나를 찾는다. 워낙 심각한 관심 종자라, 나도 이 상황이 즐거우니 나의 창업이 더 즐거웠다. 즐거우니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거워하며 동행했다.
- 지금 | 난 생각보다(어쩌면 그냥) 직설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물어봤다. "대표님, 우리 플랫폼이랑 일하는 것보다 저랑 일하는 게 이젠 더 중요하시죠?" 그렇다. 나와 일하는 것이 어떠한 방면으로든 즐거워야, 좋은 분들과 오래 일할 수 있다. 좋은 분들은 좋은 제품을 만들고, 만들어진 좋은 제품은 나의 소중한 고객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
필름케이스를 팔 땐, 분명 '스티커'나 '사탕'을 주면 나의 고객들이 즐거워했는데(...)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이 많았다. 생각보다 단순했다. 그들이 나와 일하길 진심으로 원하도록, 즐거워할 만한 것들을 '먼저' 파악해야 했다. 조금 재수 없을 수 있지만, 그리고 분명 '우창성'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게 나와 일하고 싶은 사람은 수두룩(빽빽)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매력적인 사람으로 나를 포장하는 것에서 넘어서서, 그들의 니즈를 먼저 파악하는 우창성 PD가 되는 과정 중에 여전히 있다.
포켓몬 주제곡이 몇십 년째 불리고 있는 이유를 아십니까. 우리는 모두 친구!
- 그때 | 누가 필름케이스를 보고 물었다. "이거 어떻게 만드는 거야?" 그럼 아래처럼 대답했다.
"내가 50% 정도 만들고, 복사왕 사장님이 25% 정도. 그리고 댓글 다는 고객들이 15% 정도. 우체국 누나가 10% 정도?"
혼자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함께 일을 하는 이를 친구처럼 소중히 대해야 한다. 나를 아들처럼 생각해주시던 복사왕 사장님을, 댓글 달아주는 고객들을,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많네요~'라고 얘기해주던 우체국 누나를. 친구처럼 소중히 대하는 방법은 쉽다. 그들에게 감사하고 미안한 일, 축하할 일들에 솔직하게 표현하기.
- 지금 | 어떤 회사에 소속된 직원으로, 파트너와 진짜 친구처럼 지내긴 현실적으로 힘들다. 소중한 친구를 대하듯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프로젝트를 진행함에 있어 속상하거나 기쁜 감정을 잘 공감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유능한 일처리'가 그냥 자판기 커피라면, '유능한 일처리와 감정처리'는 T.O.P. 를 온열기에 따뜻하게 데워서 서빙까지 해주는 격이다.
위의 이야기한 네 가지의 그때와 지금의 닮은 부분. 그러한 닮은 부분들이, 그때의 나에게서 지금의 나로 잘 데려다주었다.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로 잘 가기 위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이제 크라우드펀딩 PD 짬밥 '귀여운 3년 차'라고 말할 수 있는 시기에 이르렀다. 3년 차 직장인이라는 섹시한 타이틀을 내가 얻다니! (이걸 본다면 이사님부터 시작해서, 콩PD님까지 '넌 아직 애송이야.'라고 할 것만 같지만) 정말 빠르게 지났다. 왜 이렇게 빠르게 지난 걸까? 그것은 회사의 성장 때문이었다. 회사가 빠르게 성장하니, 시간이 더 빠르게 흐른다고 느껴진다. 소속된 환경이 빠르게 성장하니, 내가 쉽게 도태될 수 있겠다. 도태를 막는 방법을 고민해보니, 간단히 정리된다. 회사의 성장에 발맞추거나 쫓아가는 사람이 아닌, 성장 앞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필름케이스 상점은 3년 차에서 멈췄다. 위에서 말한 '귀여운 3년 차' 직장인은, 이제 참고할 그때가 없다. 그래서 더욱이 성장 앞에서 새로운 것들을 해야 한다.
[*이시국]이라는 외부에서 도망쳐 딱딱한 성수동 스윗홈 의자에 앉아있는 지금. 어른이 됐다고 생각하는 shy 28세 우창성 PD. (리움에 있는 '미래로부터의 기억'을 인용하여) 미래로부터의 기억을 끄집어내, 2025년 8월에 아래와 같이 말할 수 있길 바란다.
"그때가 맞았기에, 지금도 여전히 맞아서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