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참 아름답다.
적당히 내리는 눈은 아름답다. 온 세상을 새하얗게 물들이는 눈의 마법은 바다를 보면 가슴이 탁 트이는 효과와 비슷하게 마음을 정화시켜 준다. 그 차갑고 반짝이고 소복이는 느낌은 그 무엇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눈만이 가진 유일함이다. 눈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동시에 설렌다. 적당히 올 땐 그렇다.
강의가 있는 날이라 마음이 분주했던 아침엔 눈이 펑펑 내렸다. 오전 강의라 평소보다 아이를 유치원에 일찍 데려다주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섰는데 하필이면 그때 눈이 내려 등원 길을 더디게 만들었다. 아이의 손을 붙잡고 천천히 걸으며 잔잔히 대화를 나누고도 싶었지만 눈의 낭만 따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아쉬워하는 아이에게 유치원이 끝나면 눈놀이를 실컷 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늦은 오후에 아이를 다시 만났다. 평소 간식을 가져오지 않으면 서운해하는 먹보 대장이 간식도 찾지 않고 그저 눈놀이 할 생각에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아이는 아마 하루 종일 기다려왔나보다. 실컷 눈에 파묻힐 시간을.
이렇게 갑자기 겨울을 맞이하게 될 줄 몰랐다. 눈이 아이 무릎까지 쌓인 걸 보고 그제서야 겨울 부츠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운동화는 다 젖어버릴 것 같아 급한 대로 얼마 전 친구네 아이에게 물려받은 장화를 신겼다. 아이는 자신이 신은 게 부츠인지 장화인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눈이 와서 신났고 눈놀이를 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눈이 없는 곳으로 살살 피해 다니는 어른인 나와 달리 아이는 어떻게든 눈이 깊게 쌓인 곳을 찾아 성큼성큼 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입구가 넓은 장화에 눈이 들어가 양말이 다 젖었고 춥다고 오들오들 떨었다.
안되겠다 싶어 급하게 당근마켓 앱을 켜 아이에게 맞는 사이즈의 부츠를 검색했다. 마침 가까운 곳에 상태가 좋은 부츠가 판매 중이었다. 상점에서 퇴근해 아이 유치원으로 데리러 가는 길목에 있는 아파트라 위치도 딱이었다. 세탁 완료한 거라 바로 신길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다음날 퇴근길에 부츠를 구매해 아이를 데리러 가서 바로 신겼다.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땐 무조건 중고 앱에서 먼저 검색하는 편인데 다행히 아이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 육아용품은 늘 어렵지 않게 원하는 걸 구할 수 있다. 게다가 자주 거래하다 보니 베테랑이 되었다. 검색하는 방법이나 물건을 구하는 타이밍 등 나만의 꿀팁이 생겨 거래를 할수록 더 프로 당근러가 되어가고 있다. (원거리 거래가 귀찮을 땐 아파트 이름으로 검색해 단지 내에서 거래를 하기도 한다.)
아이 학예회 전 날 타이즈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걸 뒤늦게 알았던 적이 있다. 아동복 가게에 가서 급하게 사야 되나 발을 동동 구르며 여기저기 알아보다 앱을 켰는데 기적적으로 내가 원하는 물건이 딱 나와있었다. 하원 후 아이랑 친한 친구네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는데 하필 판매자가 그 아파트에 살고 있어 바로 그 자리에서 구매해 다음날 입힌 적도 있다. 판매자 역시 아이 학예회를 위해 구매했었는데 사이즈가 안 맞아서 새것 그대로 보관해두었던 거란다.
이런저런 사연들로 당근에 나온 중고 물건들 덕에 나의 제로웨이스트는 그리 어렵지 않은 생활의 루틴이 되었다. 게다가 이런 절묘한 타이밍에 너무도 편하게 거래를 했을 때 느껴지는 쾌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나 혹시 당근 천재 아냐?'라고 혼자 속으로 되뇌며 뿌듯해하는 내 마음을 누가 알까. 유명 브랜드의 콜라보 팝업 행사에 타이밍 좋게 앞줄에 서 리미티드 에디션을 손에 넣게 되었을 때보다 더 큰 쾌감이라고 한다면 설명이 될까.
부츠는 정말 상태가 좋았다. 아마도 두세 번 정도밖에 신지 않은 듯 사용감이 거의 없었다. 밑창도 전혀 닳지 않아 올겨울 우리 아이는 이 부츠 하나로 충분할 것 같다. 평소 답답하다고 운동화 신기를 거부하는 편이라 잘 신어줄지 걱정이 앞섰는데 다행히 발을 넣는 순간 아무 말 없이 바로 달려나갈 정도로 부츠에 빠르게 적응했다. 아마도 눈 위를 걸어 다닐 생각에 다른 건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이겠지.
나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다섯 살 아들은 따뜻하고 깨끗한 새 헌 부츠를 신고 눈 위를 마음껏 굴러다녔다. 토끼처럼 콩콩 뛰다가 강아지처럼 눈밭을 구르고 그러다 아예 누워버렸다. 순수하게 눈을 좋아하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옷이 어떻게 되든 이 시간을 만끽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내 발은 차가웠다.
아이와 함께 눈놀이를 하려면 나도 부츠가 필요했다. 이번 눈은 특히나 어마어마하게 쌓여 운동화로 다니기는 쉽지 않았다. 신발장에서 10년 전 부츠를 꺼내보았는데 밑창은 닳고 앞코는 다 까져 도저히 신고 나갈 수가 없었다. 또 당근에서 찾아야 하나.
이런 나의 고민을 해결해 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나의 동업자 도드리님. 그녀는 나와 똑같이 아들맘인데 우리의 나이 차만큼 아들들의 나이차도 10년이 넘어간다. 도드리님의 아들이 딱 우리 아이만 했을 때 샀던 부츠가 있다고 주겠다고 했다. 사실 처음엔 그리 반갑지 않았다. 고맙긴 하지만 원하지 않는 걸 받게 되면 거절해야 하고 그러면 미안해지니까. 중고를 구매할 때도 내가 원하는 브랜드와 디자인을 꼼꼼히 따지는 편이라 취향에 맞지 않는 걸 선물 받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나의 주저함을 눈치챈 도드리님은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부츠를 먼저 보여주었고 거절해도 괜찮다고 했다. 사진을 보고 바로 답을 보냈다.
"주세요."
10년도 더 된 것이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이 상태가 좋고 디자인도 예쁜 부츠였다. 몇 번 안 신고 보관해두었던 거라고 하는데 정말 새것 같았다. 가볍고 캐주얼한 느낌이라 평소에 신고 다니기에 딱 좋았다. 이렇게 난 부츠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마음껏 눈밭을 걷고 뛰고 뒹굴었다.
눈을 보고 마냥 행복할 수 없는 이유
아이는 눈을 보고 마냥 신났지만 어른인 내게 눈은 복잡한 마음이 들게 했다. 11월의 이런 폭설은 117년만에 처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양의 눈이 한꺼번에 내린 이유는 서해의 온도가 예년보다 2도 올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뜻한 바다는 구름을 더 많이 만들어냈고 우리의 계절은 무너졌다. "계속 눈의 나라에서 살고 싶다."라는 아이의 순수한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그런 미래가 올지도 모르고 그건 행복이 아니라 위험의 신호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소복이 쌓인 눈 위에 단풍잎이 우수수 떨어져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원래 이렇게 단풍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눈이 왔었나. 하나의 계절이 사라져 두 개의 계절이 공존하는 것처럼 느껴져 기분이 묘했다. 예전엔 당연했던 것들이 자연 속에서 사라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지금 또 어떤 익숙한 것들이 미래의 추억 속에 저장될까.
거리엔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져 버린 나무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많은 것을 돌이킬 수 없게 된 지금 어떻게 해야 부러지거나 꺾이지 않고 계절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을까.
걱정과 근심을 늘어놓기보다는 일상에 집중하며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싶다. 아들과 함께 중고 부츠를 신고 눈밭을 걷는 오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