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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양 Aug 22. 2020

보이후드(BOYHOOD, 2014)

 영화에 밑줄 긋기

 


들어가며


가끔, 그런 영화가 있다. 보기도 전에 이건 분명히 내 취향에 들어맞을 것이라고 느끼는 영화. 그런데 그 영화를 당장 보는가, 묵혀두는가의 기준은 아직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냥 내 기분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기분이 평범하게 좋은 날에는 타이밍이 맞으면 그냥 보고 감탄한다. 이 감독과 동시대에 태어난 게 다행이라고 뼈저리게 느끼고 일기도 쓴다. 그러나 가끔 미성숙이 성질을 부리는 날에는 그러지 못한다. 성장해서 영화 산업에 기여하고 싶었던 열망을 이루지 못한 현실에 가슴 한쪽이 꾹 뭉개져 있는 날이 그렇다. 뭐가 그렇게 잘나서 저렇게 잘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건지 도저히 알고 싶지도 않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날이 있다. 그래도 영화는 보고 싶으니, 이럴 때는 낡디 낡은 고전영화를 본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미 죽은 사람들의 공을 치하하는 건 별로 부끄럽지 않다. 지금까지 주절거린 내용이 보이후드를 이제야 본 이유이고 변명이다. 사실 이 영화는 개봉되자마자 봤어야 한다. 정말 그렇다. 나는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 3부작을 토이스토리 3부작만큼이나(토이스토리 4는 없는 것으로 친다) 완벽한 3부작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비포 선라이즈는 청소년기의 내 자아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내가 되고 싶은 여자의 모습(중에 하나)은 줄리 델피가 되었고, 원피스 위에 성의 없이 매듭지은 남방과 제멋대로 뻗은 머리카락이 황홀하게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그리고 에단 호크, 그는 내가 비포 선라이즈를 본 이유다.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보여준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 에단 호크에 그야말로 푹 빠진 나는, 에단 호크가 나오는 모든 영화를 봤다. 그러니 에단 호크와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만남이라는 것만으로도 내가 이 영화의 개봉일을 기다릴 이유는 충분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쯤 아까 말했던 (뭣도 없는 주제에) 영화 산업계에 있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하는 나 혼자만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을 때였으므로, 영화관에 걸린 소년의 포스터를 외면했다. 게다가 이 감독은 보통 사람도 아니라서, 12년 간이나 같은 배우로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참 나.




나는 어떻게 내가 되었나


분명, 내가 10대나 20대 초반에 이 영화를 봤다면 이러한 물음에 집중했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내가 되었나. 보이후드는 지금까지 내가 본 영화 중에 가장 인생을 닮아있다. 어떤 극적인 사건도, 지속되는 갈등도 없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그 사건이 외계인의 침공만큼이나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곤 한다. 나는 남들보다, 혹은 남들만큼이나 우울한 청소년기와 20대를 보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20대 중반까지 나는 끊임없이 내 과거의 어느 순간에 얽매여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엇나간 행동과 발언은 그런 과거의 경험이 방패막이 되어 정당화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영화는 12년만큼 길지 않지만, 충분히 소년 메이슨의 인생을 충실히 보여줬다.


왜 사람들은 우리 보고 순간을 잡으라고 할까?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해. 순간이 우리를 잡는 거지.


이 영화의 명실상부한 명대사인 ‘The moment seize us(순간이 우리를 잡는 거지).’라는 말은 보이후드를 설명하는 완벽한 한 마디이다. 인생의 무수히 많은 하루들은 서로 공평한 양으로 주어지지만, 우리는 평생 몇몇 특정한 순간을 붙잡고 산다. 그러한 순간은 매우 강력해서 쉽게 지워질 수 없는 흔적이 되고, 나를 ‘나’로 만든다. 지금은 나 또한 그동안 붙잡고 있던 순간이 사실은 별 것 아니었음을 혹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그저 자신의 인생을 열심히 살고 있었음에 불과하며, 나에게 어떤 상처를 입히기 위해 존재하던 NPC나 안드로이드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영화는 메이슨이 6살부터 18살(대학 입학)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고, 내가 만약 대학 신입생 혹은 20대 중반 이전에 이 영화를 봤다면 메이슨의 성장기에 큰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정당화를 더욱 굳건히 했을 것이다. 맞아, 순간이 나를 붙잡았어. 그래서 내가 이 지경이야. 그렇지만 지금은 이렇게 말한다. 그 순간들은 다 별 것도 아니었어.





고길동을 이해하는 마음처럼


내가 자꾸 10대나 20대에 봤다면이라는 가정을 하는 이유는, 나는 실제로 이 영화를 서른이 넘은, 게다가 결혼까지 한 유부녀의 신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릴 적 붙잡고 있던 순간들이 완전히 나에게 손을 거둔 건 아니다. 게다가 가끔 새로운 순간에 여전히 붙잡히면서 산다. 그래도 지금의 나는 세상을 마냥 우중충한 먹구름이 잔뜩 낀 절망의 모습으로만 인식하진 않는다. 30대가 되면 인생이 참 심플해진다-라는 말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어느 정도 맞다. 나는 번듯한 직장이 아니라 프리랜서의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딱히 부잣집 남편과 결혼한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에 동의한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운이 따랐음을 인정한다. 나는 그래도 날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만났으니, 아마 더 일찍 안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우울감과 절망감으로 좌절하고 있는 20대에게 무책임하게 ‘30살이 넘으면 달라진다’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20대에는 오히려 마음껏 절망해보는 것도 좋다. 그때는 죽을 것 같았지만, 그 침전의 시간에서, 점점 나는 깊어졌다. 나는 여전히 그때의 내가 읽은 책과 본 영화의 자양분을 먹고 산다. 새로운 책과 영화를 꾸준히 읽는 힘도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니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말하고 싶다. 과거의 순간으로 앞으로의 나를 포기하는 건 너무나 아깝다.



결국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 거야.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결혼하고 애 낳고 이혼하면서! 네가 난독증일까 봐 애를 태웠던 일, 처음 자전거를 가르쳤던 추억...
그 뒤로 또 이혼하고, 석사학위 따고, 교수가 되고, 사만다를 대학에 보내고, 너도 대학에 보내고... 이제 뭐가 남았는지 알아?
내 장례식만 남았어!

난 그냥... 뭐가 더 있을 줄 알았어.


서론이 길어졌다만,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서른이 넘어 본 보이후드에 올리비아가 있었다는 것! 그녀는 메이슨과 메이슨의 누나 사만다를 홀로 키우는 싱글맘이다. 아이를 혼자 힘으로 키우려니 힘에 부친다. 어린 나이에 낳은 아이들을 책임지기 위해 늦게나마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강사가 된다. 바쁘게 공부하고, 애들을 챙긴다. 중간에 남자를 몇 번 만났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12년의 세월을 같은 배우로 찍다 보니, 배우들의 외형에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세월의 흐름이 느껴진다. 어떤 특수 분장도 이길 수 없는 그 세월의 흐름은 그녀가 지나온 세월들이 얼마나 고되었는지 모두 목격한(그랬다고 믿고 있는) 우리에게 묘한 감동을 준다.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명장면은 대학에 진학한 메이슨이 독립을 위해 짐을 싸던 장면에서 올리비아가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다. ‘I just thought there would be more!(나는 뭐가  있을  알았어!)’라는 대사가 내 미래를 보여준다고 느꼈다면 지나치게 앞서간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 아기도 없고, 결혼한 지 갓 1년을 넘겼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어렴풋이 나에게 저런 순간이 올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끝엔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르고, 지금은 사이가 좋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남편이 휙 내 곁을 떠날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혼자가 되어 나도 저 말을 중얼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치열하게 하루하루 할 일이 있었던 때와 달리, 지금은 정해진 업무와 손에 꼽을 만한 인간관계만 챙기면 그만이다. 내 삶의 대체적인 방향은 정해져 있다. 어쩌면 사람들은 2세를 낳음으로써 그 공허감을 어느 정도 채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식들까지 다 떠나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나에게는 여전히 영화와 책이 손에 있겠지만, 예전만 한 재미는 없을 수도 있다. 이미 내 사상과 생각은 꼿꼿하게 굳어서 새로운 깨달음이 더 이상 나에게 쾌감을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물론 올리비아는 이렇게 외치고는, 어떤 모임에 처음 나갈 수도 있고 혹은 새로운 취미를 위해 어떤 센터에 등록을 하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결국 저 외침도 메이슨이 떠나는 순간에 붙잡힌 올리비아의 지나가는 비명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게 인생 아니겠는가.





나가며


역시나 내가 예상한 대로 보이후드는 나에게 ‘맞는’ 영화였다. 왓챠에서 영화를 감상하고 나는 주저 없이 별점을 꽉 채운 5개로 주었고, 일상 중에 가끔 멍하니 있을 때 보이후드의 메이슨과 올리비아를 떠올렸다. 그리고 감독이 12년 간 각본을 한 번도 수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영화감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좋은 영화는 이미 많다. 내가 죽기 전에 다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많다. 어쩌면 세상에 좋은 영화가 충분히 많다는 건 내가 올리비아의 입장이 되었을 때 마냥 허무함을 느끼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사실이 될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다행인지.


이 영화가 나온 당시에 보지 못한 건 지금 조금 후회하지만, 지금이라도 봐서 다행이다. 이 영화를 보고서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싶은 마음이 불끈 생겼다. 만약 내가 자식을 낳아서 대학까지 다 보낸 후에 이 영화를 봤으면 올리비아가 소리 지르는 장면에서 바로 소주를 깠을지도... 


이 영화를 미리 백신 삼아 올리비아와 같은 순간이 온다면 소리 한 번 빽 지르고 잘 넘기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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