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재수학원 러브스토리
스무 살, 다니던 대학에 휴학계를 내고 등록한 재수학원은 ‘하트 시그널’ 속 시그널 하우스 같았다. 노비끼리 힘들어서 정분난다더니, n수생들은 재수 학원에서 정분이 났다. 누구나 10층짜리 재수 학원 안에 자꾸 눈이 가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었다. 나와 친구들은 그걸 재수 생활의 빛과 소금, 줄여서 ‘빛소금’이라고 불렀다.
내 빛소금은 키가 크고 까무잡잡한 애였다. 사실 재수 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그 애와 나는 대학가에 있던 생맥줏집에서 한두 달 같이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조금 친해질 때쯤 그 애는 재수 학원에 들어갔다. 그 애가 사라진 뒤, 나는 생맥주를 자꾸만 거품 폭탄으로 만든다는 이유로 아르바이트에서 잘렸다. 그리고 두세 달 후 반수를 결심했다.
인싸 중의 인싸였던 빛소금은 학원에서도 친구가 많았다. 덩치 큰 남자애들과 우르르 몰려다니곤 했다. 아싸 중의 아싸인 나는 친구들 사이에 껴 있는 그 애에게 쉽게 아는 척하지 못했다. 발견하고도 모른 척 지나쳤다. 반면, 그 애는 나를 발견하면 꼭 제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내게 인사를 하러 달려왔다. 이거 유죄 아닌가?
쨌든, 어느 순간 그 애는 내 재수 생활의 ‘빛과 소금’이 됐다.
빛소금은 학원 기숙사에 살았고 나는 근처 고시원에 살았다. 빛소금은 밤마다 운동을 핑계로 외출을 허락받았었는데 늘 나를 불러 함께 운동하려 했다. 학원이 끝나고 고시원에 도착해 20분쯤 지나면 그 애에게 나오라는 전화가 왔다. "네 체력은 쓰레기야! 그러니까 자꾸 졸지!" 같은 고든 램지 급 잔소리를 하며. 나는 나가기 귀찮은 척했지만, 사실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 애에게 전화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애가 운동장을 세 바퀴 뛸 동안 나는 한 바퀴를 슬슬 걸었다. 그 애는 나를 스쳐 가며 좀 뛰라는 잔소리를 하곤 했다. 생각해보니 꽤 잔소리쟁이였다.
우린 썸이 아니라 나의 짝사랑이었고, 우리의 관계는 '플립'되지 못했기에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그런데 이상하지. 시간이 지날수록 나쁜 기억은 흐릿해지는데 사소하고 예쁜 기억은 선명해진다. 언젠가 운동장에서 누군가가 놓친 강아지를 잡아주려 함께 뛰던 날이 있었다. 강아지의 생김새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데, 강아지를 찾기 위해 높은 담을 넘던 그 애의 모습과 기껏 담을 넘어서 찾았더니 강아지가 나만 따라서 툴툴거리던 목소리는 아직까지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