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사진에세이
다시 습관처럼 그 곳을 찾았다.
습관이란 그렇게 마음이나 머리보다 몸에서 먼저 꿈틀대곤 한다.
반팔과 긴 팔 옷을 입은 사람들,
사랑을 안고 있는 사람들과 놓아버린 사람들,
빠르게 달리거나 또는 느리게 멈추었다 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 사이에서 내 몸의 습관은
봄과 여름의 가운데 놓인 장미로 향하게 했다.
나는 짧은 팔 옷을 선택했고,
느리게 걷기와 사랑을 차마 버리지는 못한 가슴-안고 있다고 혹은 버렸다고 하기도 애매한 마음-으로
장미의 정원에 발을 들여 놓았다.
때때로 어느 곳에도 속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 날은 장미들 사이에 내 존재를 묻고 싶은 날이 있다.
그건 신나는 일이었다.
문 밖에는 산더미만큼 장미가 내동댕이 쳐져 있었다.
병이 돌았다한다.
내가 문 안으로 들어가 만난 장미들은 그나마 가시와 줄기를 떠나지 않아도
되는 살아남은 꽃들이었지만,
그 마저도 시들하여 언제 문 밖으로 쫓겨날지 모를 정도로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살아 남는다는거.
어떤 것과 어떤 것이 대조 또는 비교되는 이 세상에서
그건 또 쉽지 않은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싱싱한 장미와 시든 장미.
문 밖의 장미와 문 안의 장미.
내 몸의 습관은 그것도 모르고 나를 그곳에 데려다 놓았지만 말이다.
버려진 장미를 집에 가져가도 되냐고 물었다.
흔쾌히 허락은 받았지만
나는 결국 가져오지 못했다.
병든 장미를 데려다 놓고 안타까워하지 않을 자신도 없었고,
무엇보다 정성의 시간을 장미의 혼에 불어넣었을
주인 아저씨의 씁쓸한 미소가 나를 허락만 얻고
그냥 간다고 하는 싱거운 사람으로 만들어버린거다.
늘 그렇듯,
주인 아저씨는 어디다 쓸 사진이냐,
이 곳은 어떻게 알았냐 질문이 많다.
작년에도, 그 이전 해에도 나는 찾아왔었는데 말이다.
올 해는 '기나미'라는 청년이 그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병든 장미를 훈훈히 감싸줄 것만 같은 밝은 미소를 한 타국의 청년.
아저씨와 기나미는 우리도 한 장 찍어주고 나중에 생각나면 한 장 가져다 달라한다.
말은 기껏 주인 아저씨가 꺼내놓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딴청이고 기나미만 그 씩씩한 웃음을 보내 준다.
장미를 닮았다고 해도 좋을 미소였다.
또 다시 나도 몰랐던 내 몸의 습관이 그 곳으로 가자고 조르는 그 날엔 건강한 장미들을 만나고 싶다.
하지만 그 날의 종이 기록들도 내겐 아름다웠다는걸
기나미, 주인 아저씨, 당신들은 아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