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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k씨의 주된 관심사는 뭐죠?
책방 주인 e씨가 무심한 투로 물었다. 관심사, 관심사, 요즘 내 관심사가 뭐지, 뭐지, 뭐지……. 나는 매사에 반응이 늦다. 가뜩이나 머리 회전이 느린 나로선 e씨의 질문이 종종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어떤 때 그의 질문은 돌덩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느닷없고 묵직하게 날아온다. 맥락 없이 맞으면 잠시 멍해진다.
k씨에게 행복이란?
……
k씨는 꿈이 뭐예요?
……
그렇게 늘 말문이 막히곤 하는데 이번에도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대꾸할 타이밍을 놓쳤다. ‘배를 곯지 않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정신없이 대화가 오가는 통에 그 질문은 다른 이의 말에 흔적도 없이 덮여 버렸지만 나는 속으로 천천히 되뇌며 문장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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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저기 원고를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로 일한다. 자유기고가는 한때 프리랜서의 표상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일정한 소속 없이 신문과 잡지 따위에 자유롭게 기고하는 사람. 어딘가 자유분방함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자유분방하긴 한데 문제는 벌이가 시원찮다는 점이다. 자유기고가 강좌를 들으러 처음 강의실에 간 날, 강사를 포함해 단 네 명이 그곳에 모여 앉아 있는 광경을 보면서 내가 뭔가 잘못된 판단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앞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공중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순식간에 불안이 내 뇌를 잠식하는 듯했다. 인터뷰 기사 쓰기를 목표로 서로를 인터뷰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는데, 인원이 홀수인 관계로 나와 짝을 이룬 강사는 이전에 어떤 일을 했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주로 기자 일을 했다고 대답했다. 한때 입사 지원할 때마다 자소서에 제4의 권력, 저널리즘, 국민의 알 권리 따위의 단어를 끼워 넣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물론 이제 와 한낱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는 용어들이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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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비가 내리는지 모르겠다. 일주일 넘게 퍼붓고 있다. 기상청의 예보가 통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르웨이로 옮겨가는 ‘기상 망명족’도 생겨났다. 궂은 날씨에도 외부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것처럼 곤혹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폭우가 내리는 동안 사흘째 서울과 수원을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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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회사 동기들을 만났다. y는 내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처럼 보인다며 부럽다고 말했다.
완전 편하잖아요. 걱정도 없고.
글쎄요. 저처럼 살아보고 싶어요?
그렇게는 못하죠.
y는 또 이렇게 물었다.
직장인이 부러울 때도 있어요?
직장생활은 안 부러운데 월급은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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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무렵 원고 세 건 의뢰가 들어왔는데 이번 주 인터뷰를 진행하고 다음주 월요일까지 원고를 써달라는 요청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건은 좀 어렵겠어요.’ 이 말만은 목구멍 속으로 삼켰다.
마감 기한을 조금 늦출 수 있을까요?
다행히 이틀 늦출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인터뷰를 할 대상과 일정이 안 맞으면? 말짱 헛수고다. 일정 조율하고 질의서 만드는 데에만 한나절이 흘렀다. 어찌된 영문인지 일은 꼭 몰려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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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무심하다. 허송세월할 때도, 요즘처럼 시간을 쪼개어 쓰려고 애쓸 때도 시간은 사정 봐주는 법이 없다.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쉽지 않다는 걸 실감한다. 시간을 내서 뭔가 쓰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밤 12시가 넘어서야 겨우 일기를 쓴다. 고작 일기를. 사실 나는 글 쓰는 행위 자체를 귀찮아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글쓰기에 즐거움을 느끼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슬프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제대로 된 글쓰기의 즐거움을 느낄 기회가 없어서일까? 내가 업으로 삼는 글쓰기에는 나의 사상과 가치관을 녹여낼 여지가 없다. 기회는 만들기 나름이지만 어쨌든 지금으로선 그렇다. 그나마 일기를 쓰려고 노력 중이다. 카프카의 일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커다란 욕구, 사실은 오늘 오후부터 계속 가지고 있었던 커다란 욕구란, 내가 느끼는 이 두려운 상태 전체를 완전히 내 안에서 끌어내어 글로 쓰는 것, 그리고 또한 그것이 어떻게 심연에서 나와서 다시 저 종이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는지 등에 대해서 글로 쓰는 것, 그래서 내가 글로 쓴 것을 나 스스로 다시 완전하게 내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도록 그렇게 쓰는 것이다.” 그렇게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