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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헥토르 Sep 28. 2018

야근 때 생각 26

시간: 17:30


이 시대에 전 세계의 시청자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드라마가 있으니, 왕좌의 게임이 바로 그것이다. 왕좌의 게임을 보다 보면 거기서 나오는 주인공 중에 “존 스노우”라는 캐릭터가 나오는데, 사실상 인간 세계에서 가장 정의롭고 도덕적이며 용맹한 왕이자 인간으로 나타난다. 다만 흠이 하나 있다면 시종일관 드라마에서 줄곧 대사 속에 아오는 이른바 “Bastard”, 즉 서자 출신이라는 것이다. (실은 알고 보니, 서자는 아니었지만 극 중에서는 대부분의 시즌에서 서자로 계속 알려진다.) 이 왕좌의 게임은 유럽 전역에도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음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으며, 또한 어느 유럽인을 만나도 이 드라마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중요한 드라마 중 하나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업에 있어서 특히 해외 법인에 있어서 한국인 주재원과 한국인 현채인의 관계는 이 드라마에서 나온 것처럼 적자와 서자의 개념과도 같다. 이 서자의 느낌이라… 표면적으로는 보이지는 않지만 표면 밑에 가라앉아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서자라는 느낌을 충분히 만들게 하고도 남는다. 여러 가지 요소 중에 하나가 바로 경제적인 부분, 특히 경제적인 부분은 같은 한국인 아래에 서자라는 것이 상당히 두드러지는 부분 중에 하나이다. 월급의 차이와 복지의 차이가 적어도 2~3배 이상의 차이는 기본으로 나타나며, 삶의 질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된다. 물론 적자인 주재원의 경우는 많은 책임과 엄청난 양의 일과 스트레스로 하루하루를 괴롭게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안다. 

주재원은 회사생활에서의 꽃이라고 불리는데, 그 꽃을 피우기 위해 부단한 노력과 땀이 한국에 있는 본사에서 이루어지고, 꽃을 피운 시점에서도 그 꽃이 열매를 맺기 위해 (그 열매는 자식의 교육, 금전적인 부의 성취, 해외생활에서의 낭만, 또 다른 기회의 창출 등) 엄청난 양의 혹독하고 매서운 찰렌지가 가시밭길처럼 이어져 살아오게 된다. 괴로운 꽃으로서 그 수정을 맺기 위한 벌과 나비들과의 사투, 혹독한 자연환경에 놓인다. 당연히 그 꽃에 지불하는 돈의 보상은 당연히 커진다고 본다. 다만 서자인 한국인 현채인도 엄청난 업무에 시달리는 것도 알려져야 할 부분이다. (공무원처럼 여유 있게 일하는 소수의 한국인 현채인도 있으며 나라마다 법인마다 각각 다르기 때문에 조심이 얘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폴란드 사람처럼 같은 현재인의 조건에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회사라 한국인에게 보다 더 많은 일감을 몰아주는? 그런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나타난다. 보다 더 디테일하고 섬세함과 시간의 소비를 요하는 일에 한국인이 투입되며 적자와는 보다 훨씬 적은 월급으로 일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어쨌든 상대적으로 일과 보상에 대해 논란의 여지를 많이 남기고 있는 부분이다. 한국 현채인을 그저 동일한 로컬 현채 외국인으로 볼 것이냐, 혹은 주재원과 동일하게 볼 것 이냐,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중간지점으로서 역할과 보수를 받아야 하는 존재로 볼 것이냐가 문제이며, 기업 입장에서는 대부분 마지막의 경우로서 그 역할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어있다. 

다만 보상과 복지 측면에서는 지속적으로 아쉬운 부분을 보이고 있는데, 결국엔 형평성 문제이다. 가령  서구 유럽 특히 프랑스/독일 등과 같은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의 한국인 현채인은 로컬 현채인(프랑스 사람, 독일 사람)의 월급처럼 많이 줄 수가 없어 한국인 수준으로 주어야 한다는 논리로 월급을 통제하고 있고, 동구 유럽인 폴란드/헝가리는 상대적으로 저개발국가에는 한국인이라 할지라도 현지 채용이 되었기 때문에 로컬 현채인(폴란드 사람, 헝가리 사람)의 수준을 맞춰야 하거나 혹은 간극이 나면 안 된다는 논리로 월급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 현채인은 이리저리 모순에 쌓인 월급 체계에 표류하고 마는 존재로 고민과 고민을 생산하게 만든다. 형평성의 잣대가 이리저리 기업의 입맛대로 다루어지고 있고, 이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분위기도 사실 업는 상태이다. 


영세적인 기업에서는 임금의 부담이 크다. 그래도 내가 일하고 있는 이곳은 나름 한국에서 대기업이라는 간판으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전 세계에서 주재원만큼 고생하는 한국인 현채인의 복지와 경제적인 부분은 과연 얼마나 적자의 인물처럼 서자를 생각해주고 있는지 질문을 던져본다. 더불어 수많은 로컬 현재인, 우리에게는 외국인 친구들이 지금 이 순간도 이렇게 짜디 짠 월급과 낮은 업무의 만족도로 자신의 커리어의 마지막 목적을 우리가 회사가 아닌 또 다른 기업으로 생각하여 이력서를 쓰고 보내고 있을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결국 셀링 클럽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축구팀 영국의 리버풀이라는 클럽도 2010년도 이후로 부진한 성적으로 명문 클럽이었지만 지금은 유명한 축구 선수들이 잠깐 거쳐가서 더 높은 하이 커리어로 이전하는 중간 정착지로 되어버린 클럽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좋은 선수들을 파는 팀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 회사는 셀링 클럽인가? 아닌 명문 클럽인가?


마케팅과 그 밖의 검증이 덜된 비용이 세어나가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사람의 임금의 상승을 걱정하여 월급을 통제하려 든다면, 그리고 구조적으로 그리고 프로세스 적으로 기업 안팎의 비용을 통제하려 한다면 표면적인 비용은 줄일 수 있을 수도 있겠다. 다만 프로세스는 관성적인 모습으로 시간의 흐름에 편승 될 때, 사람은 자기 머리로 생각할 줄 모르고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할 줄 모르면 평범하게 그 프로세스에서 발생되는 비용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인다. 훌륭한 인재, 자신의 일을 보다 고민하는 인재 들은 구조적으로 그리고 프로세스적으로도 막을 수 없는 비용들, 기업에 입장에서는 악이 될 수 있는데, 그러한 것에 대해 Ownership을 가지고 스스로 생각하여 막아내려고 힘쓴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투자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사람을 위해 쓰기 위해 노력하는지 다시 재고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회사에서 주는 월급으로 물건을 사고, 소비하며 자신의 생활을 영위해 간다. 결국 회사가 주는 월급은 다시 기업에게 소비로 돌아와 선 순환 구조의 역할을 만드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왜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비정규직 문제로 시끌시끌하다. 상대적으로 해외 생활 영위라는 타이틀 하나만 가지고 한국을 떠나 각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 현채인들, 그들 역시 언젠가는 한 번쯤 주목받아 더 나은 복지를 외치고 그들이 더 이상 Bastard가 아님을 비극의 존스노우가 아닌, 진정한 기업의 주인으로서 혹은 법인의 주인으로서 자리 잡아갈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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