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이들을 키우며 스스로 생각하기에 엄청나게 좋은 아빠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다른 아빠들보다 잘한 것 같다고 생각되는 게 많지는 않지만 몇 가지가 있는데요. 그중 하나가 사춘기 딸네미와 단둘이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것입니다.
2019년 여름이었습니다. 반년뒤 처음 보는 바이러스로 인하여 세계가 전염병으로 초토화되고 인류가 패닉에 빠지리라고는 전 세계 어느 누구도 정말 상상조차 못 하고 있던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20년 가까이 앞만 보며 열심히 달려온 회사 생활에 지친 저는 혼자 어디 좀 훌쩍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사랑하는 가족과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 너무 소중한 회사를 잠시 떠나서 혼자 조용히 리프레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죠.
아이들은 여름 방학 한 김에 잠시 외갓집에 보내놓고, 아내와 둘이 평화롭게 저녁을 먹다가 제가 문득 이야기를 던졌습니다.
"여보. 나 혼자 며칠 여행 좀 다녀오면 안 돼?"
"혼자? 어딜?"
"유럽에 며칠 다녀올까 싶은데?"
"유럽? 유럽 여행을 혼자 다녀오겠다고? 제정신이야?"
"요즘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서 그래. 여행비 달라고 안 하고 그동안 내 용돈 모은 걸로 다녀올게."
"당신 혼자만 힘들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꼬불쳐둔 돈 있음 생활비 하게 좀 내놔!"
"..."
뭐 그렇게 분위기 싸늘하게 상황은 일방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불쑥 혼자 유럽 여행을 다녀오겠다니.. 먹여 살려야 할 식구가 있는 가장이 새운 작전치고는 사실 처음부터 좀 서투른 계획이었죠. 뭐 그래도 이렇게 물러설 수는 없으니, 퇴근할 때마다 다크써클이 바닥에 끌릴정도의 힘든 표정을 짓고, 직장 생활에 찌든 가장 코스프레를 하며 집에 들어섰습니다.
그러기를 며칠. 아내가 이야기를 툭 꺼냈습니다.
"어느 나라가 가고 싶은데?"
"어디를 꼭 정한 건 아닌데.. 이탈리아?"
"당신이 혼자 이탈리아에 가서 아가씨들 훔쳐보며 침 질질 흘리고 있을 꼴을 봐줄 수는 없으니, 떠덩이(딸네미 별칭)를 데리고 둘이 다녀온다면 허락할게."
"잉? 떠덩이랑 둘이 가라고?
"응. 떠덩이가 당신 감시자야. 대신 떠덩이 여행비는 내가 줄게."
"......"
상황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습니다.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서려는 초등학교 5학년 딸네미와 갱년기가 멀지 않은 중년 아빠 둘이서의 해외여행이라. 잘 다녀올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래도 딸네미가 시간이 지나서 아빠와 더 멀어지기 전에 둘만의 추억을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아. 콜!"
"알았어. 그럼 여행 계획 세워서 알려줘. 떠덩이 학교에 체험학습신청서도 제출해야 하고 학원 일정도 조정해야 하니까."
원래는 혼자 여행을 가면 자유여행을 하려고 했었지만, 초등학생 딸네미와 둘이 자유여행으로 다니는 것은 너무 무리일 것 같아서 패키지여행을 가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여러 여행사의 이탈리아 여행 상품을 알아보다가 11월 초에 다녀오는 7박 9일짜리 일정을 선택하고 예약을 하였습니다. 회사에는 여름에 못 간 하기휴가를 11월 초에 다녀오는 것으로 조정을 하고, 아이의 학교와 학원 일정도 조절을 하였습니다.
잡아놓은 시간은 참 빨리 오는 법이죠. 바쁘게 일상생활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이탈리아로의 출발일이 되었습니다. 출발일 이른 아침 저와 떠덩이가 등에는 백팩 가방 하나씩 짊어지고, 각자의 캐리어를 하나씩 끌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아내가 차로 여행 가는 남편과 딸네미를 공항철도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아내에게 걱정 말라며, 딸네미와 싸우지 않고 잘 다녀오겠노라고 인사하고 돌아서서 딸네미와 손을 꼭 잡고 지하철역을 향하는데, 가족 전체가 여행 갈 때와는 묘하게 기분이 다르더군요.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함께 여행할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를 닮은 미모의 가이드 분과 짧게 미팅하고, 나누어주는 티켓과 여러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받고서 출국 수속을 하였습니다. 이탈리아 까지는 먼저 인천발 바르샤바행 폴란드 항공 LO098편을 탑승하고, 바르샤바 공항에서 다시 폴란드 항공 LO319편으로 갈아타고 이탈리아 밀라노에 도착하는 일정이었습니다. 인천공항과 폴란드 바르샤바를 운행하는 항공기는 보잉 787-9 드림라이너라는 미국 보잉사에서 제작한 최신형 항공기였습니다.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동안 부녀간에 나란히 앉아서는 각자의 비행을 즐겼습니다. 술 먹을 사람은 술 먹고, 게임할 사람은 게임하고. 그런데 바르샤바에서 밀라노행 항공편 탑승을 기다리는데 작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원래는 저와 떠덩이 좌석이 나란히 예약이 되어있었는데, 항공사 사정으로 일부 좌석들이 변경되면서 둘의 자리가 꽤 떨어져 버리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덕선이를 닮은 가이드님께서 걱정스러운 듯 저희 부녀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어쪄죠~ 항공기가 변경되면서 미리 예약해 둔 좌석중 일부가 바뀐 것 같아요. 하필이면 떠덩이 자리가 바뀌었는데.. 지금 좌석 변경은 불가능하고, 일단 탑승을 마친 다음 승무원에게 자리를 바꿔달라고 부탁해봐야 할 것 같아요."
"떠덩, 어쩌지? 일단 비행기 탈 때는 아빠랑 떨어져 앉은 다음에 자리를 바꿔봐야 할 것 같아."
떠덩이가 눈을 몇 번 꿈뻑거리더니 대답합니다.
"굳이?"
"정말 혼자 외국인 아줌마 아저씨들 사이에 앉아가도 괜찮겠어?"
"응.. 나는 상관없어. 2시간 정도만 가면 된다며?"
언제까지 아기 인 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처음 보는 외국인들 사이에 앉아가는 것도 그다지 상관하지 않을 만큼 커버렸습니다. 그렇기에 아빠랑 둘이 일주일 넘게 가는 여행에도 망설임 없이 따라나섰던 걸까요? 지금도 그렇치만, 초등학생 때부터도 참 독립심 강한 아이입니다. 어쨌거나 여행 일행 중 가장 어린 꼬맹이 손님의 좌석 때문에 걱정이 많으시던 가이드분께서 한숨 놓으셨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물어보니 주스도 한잔 잘 먹었다고 하더군요.
밀라노를 시작으로 베로나에서 가장맛있다는 젤라또도 먹고, 피사의 탑에서 남들 다 찍는 피사의 탑 넘어지는 것 막는 포즈로 사진도 찍고, 베네치아에서 비를 맞으며 곤돌라도 타고, 피렌체에서는 아내와 아들 선물도 사고, 로마에서는 트레비 분수에서 로마에 다시 오게 해 달라서 소원을 빌며 동전도 던지고, 화산 폭발과 함께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도시 폼페이에서 그날의 긴박함도 느껴 보고,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도 두 눈으로 보고.
화장실 가는 시간만 제외하면 거의 200시간을 딸네미와 단둘이 붙어 있었습니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 당시에는 힘도 좀 들었지만 지나고 보면 너무나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사춘기 딸과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또 둘만의 은밀한 기억도 가지게 되었구요.
일상으로 돌아와 여행의 흥분이 슬슬 잊혀질 때쯤, 어느 날 주말 저녁 온 가족이 모여 배달시킨 피자와 치킨을 즐겁게 먹으며 주말을 마무리하고 있었습니다. 마르게리타 피자 한 조각을 집어서 먹던 떠덩이가 한마디 툭 던집니다.
"아빠, 아~ 이거 피자가 이탈리아 본토 맛이 아닌데?"
"그러게. 피자 도우도 그렇고.. 좀 아쉽기는 하네~"
"그렇지? 피렌체에서 먹은 마르게리따 피자가 정말 맛있었는데.. 그때 우리 옆 테이블 가족 분들이 피자 드시다 남기신 거 정말 내가 주워 먹고 싶더라니까?"
"그러게.. 그걸 남기시더라~ 우린 모자라서 못 먹었는데.. ㅎㅎ 나중에 돈 모아서 아빠랑 피자먹으로 이탈리아 가자~"
대화를 듣던 아내가 황당하다는 듯이 이야기합니다.
"나 참 듣다 보니 어처구니가없네.. 이탈리아 못 가본 사람은 서러워서 피자를 먹을 수가 없구먼~!"
옆에 있던 아들도 한마디 거듭니다.
"나는 맛만 좋구만. 먹기 싫으면 다들 내려놔! 내가 다 먹어버리게."
사실 아이를 낳아서 키우다 보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아빠보다는 엄마와 교감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아빠들도 많이 노력하지만, 열 달간 뱃속에서 아이를 키운 엄마를 상대로는 아무래도 불리할 수 밖에는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가 아직 어린 아빠들께 자녀와 둘만의 여행을 다녀오는 것을 적극 추천 드립니다. 딸이라면 특히 더요. 아빠가 딸과 둘이서만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을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이런 여행을 통하여 둘만이 평생 간직할 수 있는 기억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저의 이런 사춘기 딸과 둘만의 해외여행 경험을 전해 들은 지인 중 한 분이 용기를 내어 딸과 함께 미국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분도 평생 기억에 남을 둘만의 추억을 만들게 되어서 좋았다고 하시더라구요.
딸바보 아빠들 중에서, 딸과 둘만이 가질 수 있는 추억을 만들고 싶으신 아빠라면 둘만의 여행을 적극 추천 드립니다. 효과는 확실합니다. 개인 적으로는 최적의 시기는 초등학교 고학년 또는 중학교 저학년이 아닐까 싶네요.
엄마가 모처럼 시내에 나갔다가 유명한 가게에서 사 왔다는 젤라또를 한 스푼 크게 퍼먹던 떠덩이가 한마디 합니다.
"아빠! 아~ 이거 베로나이 있는 '줄리엣의 집' 근처에서 먹던 젤라또 맛이 아닌데~"
아내가 '쟤들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탈리아 다녀온 걸 우려먹으려나~' 하는 표정으로 딸과 남편을 한 번씩 쳐다보며 픽 웃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