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출장 업무 마치고 귀국 전에 간단하게 한게임
오래간만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로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오기 전인 2018년에 다녀온 후, 5년 만의 재방문이었습니다. 원래는 회사 비용도 좀 아낄 겸 해서 혼자서 LCC(Low Cost Carrier, 저가항공사)의 항공편 타고 슬쩍 다녀올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다 보니 판이 좀 커져서, 회사 고참 두 분을 모시고 가게 되어 대한항공을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저로서는 너무 고마운 일이었죠.
인천발 쿠알라룸프르행 대한항공 KE 671편. 2018년도 출장 시에는 이 노선에 미국 보잉사의 초대형 최신 항공기 B747-8i가 투입되었었는데, 요즘에는 유럽 에어버스사의 중대형 항공기 A330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말레이시아를 방문하는 출장/여행객이 코로나 이전만큼 획복된 것은 아닌 것 같네요.
여담이지만, 미국 보잉사의 초대형 항공기 B747은 1970년에 처음 취항한 후 1,500대 이상 생산된 베스트셀러 항공기입니다. 하지만 점차 초대형 항공기의 수요가 줄어들게 되어서 2023년 2월에 마지막 B747을 생산한 후, 안타깝게도 생산 라인이 폐쇄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마지막으로 생산된 여객용 B747을 우리나라의 대한항공에서 운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항공기의 등록번호(Registration number)는 HL7644인데요. 이번 말레이시아 출장 시 이용하게 되는 KE 761편에 지난 18년도 출장 때처럼 B747-8i가 투입되면, HL7644를 타보게 될지 은근히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A330이 투입되었습니다. 확인해 보니 HL7644기는 요즘은 주로 미주 노선에 투입되고 있네요.
본론으로 돌아와서, 여름 끝자락의 쿠알라룸푸르는 오전에는 해가 쨍하고 모습을 드러냈다가, 오후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흐려져 비가 오는 날씨가 반복되었습니다. 궂은 날씨에도 회사 고참들을 모시고, 그랩(Grab)을 이용하여 여기저기 미팅을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랩(Grab)은 동남아국가들에서 운영되는 우버와 유사한 차량 공유 서비스입니다. 일반 택시보다 요금이 절반 이하로 저렴하고, 이용도 편리하기 때문에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출장 시에는 필수 앱입니다. 배달 음식도 시켜 먹을 수 있어서 유용합니다. 그랩이 서비스 되는 동남아시아 지역 국가로 출장이나 여행 시에는 택시 타지 마시고 꼭 그랩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비용을 상당히 절약하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제가 이번에 말레이시아에 오랬만에 출장 와서 어리바리할 때, KLIA(Kuala Lumpur International Airport)에서 시내 부킷 빈탕에 위치한 숙소까지 공항 택시로 이동하면서 220링깃 (약 6만 원 남짓)을 지불했는데, 출국할 때는 그랩을 이용하여 숙소에서 공항까지 105링깃 지불하였습니다. 이런 서비스를 우리보다 뒷쳐져있다고 생각하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도 여러 규제에 막혀있습니다. 이제는 당당히 선진국인 대한민국이 말로만 IT강국이 아닌지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여튼 고객과 미팅이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바람에 시원한 회의실에서 혼자 땀도 뻘뻘 흘리고, 상대 회사 대표와 함께한 점심식사 자리에서는 영어 농담을 이해하느라 바짝 긴장도 하였습니다. 잠시 생긴 여유 시간에는 파빌리온(Pavilion)이나 수리아몰(Suria KLCC)에가서 아이쇼핑도 즐기고, 모처럼 일행끼리 저녁 식사 하는 날은 잘란 알로(Jalan alor)의 야시장에 가서 현지 해산물로 저녁식사를 하고, 바쁜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며 마사지거리에 가서 발마사지를 받았습니다.
출장 마지막날. 원래 일정은 편도 두 시간 정도 거리의 도시에 위치한 고객사로 이동하여 오후에 미팅을 하고 나서, 저녁 늦은 시간에 쿠알라룸프르를 출발하는 대한항공 KE672편으로 귀국하는 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침 이른 시간에 고객사 담당자로부터 급하게 메시지가 도착하였습니다.
"미안하지만 오늘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미팅을 취소했으면 좋겠다. 다음 주에 만날 수 있냐?"
하지만 저희 일행은 저녁 비행기로 출국 예정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간다. 다음 주에는 온라인 미팅만 가능하다."
고객에게 회신을 하고 나서 함께 출장 일행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죄송하지만 고객사 Keyman의 건강 문제로 오늘 미팅은 취소되었습니다. 오늘 못한 미팅은 다음 주 중 온라인 미팅으로 진행하겠습니다."
말레이시아 현지 협력사를 통해서 다른 미팅을 잡아볼까 잠시 고민하던 저는, 미팅이 취소된 게 내 잘못도 아니고 에라 모르겠다 일단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저녁 8시쯤 공항으로 출발하면 될 것 같으니, 오늘 하루가 비었습니다."
고참들께서 뭐라고 하시려나 긴장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하는데, 카톡의 숫자가 하나 줄어들더니 잠시 후 최고참께서 메시지를 남기셨습니다.
"출장 와서 일만 하다 갈 뻔했는데 잘됐네. 오늘 어디 좀 다녀옵시다."
업무 출장지에서 잠시 여유 시간을 내서 개인 여행을 즐기는 블레저(Bleisure = Business + Leisure). 출장때마다 블레저 여행을 염두에 두는 저는, 출장을 준비할 때마야 계획에 없던 여유가 생기면 알차게 활용하기 위하여 가보고 싶은 곳을 미리 고민해 두는 스타일입니다. 페트로나스 타워 전망대, 쿠알라룸푸르 국립 박물관 등 이미 고참들께서 다녀왔다고 했던 곳들은 제외하고, 몇 가지 떠오르는 일정을 단톡방에 남겼습니다.
"이슬람 박물관 구경하고, 센트럴 마켓 들려서 시장 구경 해도 괜찮을 것 같구요."
조금 기다렸지만 별로 반응 없습니다.
"쿠알라룸푸르 외곽에 힌두교 성지인 바투 동굴(Batu cave)과 주석박물관을 다녀오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아~ 그 계단 많은데? 나 저번에 갔다 왔는데."
역시나 시큰둥한 반응.
"말라카까지 다녀오기는 좀 멀죠?"
말라카(Malaka)는 2008년에 도시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인데요. 우리나라의 경주 같은 도시입니다.
"거긴 차 타고 왔다 갔다 하고 나면 비행기 타야 할 듯"
아.. 고참들 맞추어 드리기 쉽지 않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저는 마지막 필살기를 던져보았습니다.
"카지노 가서 돈이나 좀 벌어갈까요?"
"오~ 대박. 나 카지노 아직 한 번도 못 가봤는데!"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돈을 잃어본 적이 없지! 우리가 들어 갈 수 있는 카지노가 있나?"
마침내 오는 격한 반응.
"예. 차로 한 시간 정도 가면 겐팅 하일랜드(Genting Highlands)라는 곳이 있는데요. 2,000m 가까운 고지대에 있어서 날씨도 선선하고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중년 남자 셋이 그랩을 잡아타고, 구름 위에 지어져 있다는 겐팅 하일랜드로 향했습니다. 요금 좀 아껴보겠다고 탑승한 차량이 1,300CC라는 엄청난 배기량을 자랑하는 승용차라 언덕길에서는 빌빌 거렸지만, 그 안에 탑승한 승객들의 비장한 기세는 바로 홍콩영화 주인공으로 스카우트되지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죠. 재미나게 말씀을 잘하셨던 그랩 기사님 덕에 지루하지 않게 겐팅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 일행은 도착하자마자 먼저 식당에 들어가 점심 식사와 참이슬을 한잔 하였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죠. 누들로 속을 든든히 채우고, 한국산 참이슬로 정신무장을 마친 저희 일행은 겐팅 리조트의 카지노에 입장하였습니다.
곧장 VVIP룸으로 들어가겠다는 고참들을 설득하여, 겨우 일반룸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포커, 바카라, 룰렛 등 여러 게임을 즐기고 계시는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카지노 장을 한 바퀴 돌고 나서, 고참 두 분은 가장 만만해 보이는 룰렛 기계 앞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예전에는 룰렛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게임을 했었는데, 지금은 모두 전자 단말기 앞에 앉아서 게임을 하도록 되어 있는 점이 신기하였습니다. 고참 두 분은 룰렛 기계 앞에 앉아 100 링깃 지폐(약 한화 30,000원)를 넣고 게임을 시작하셨습니다.
"강박사, 넌 왜 안 해? 100링깃 줄까?"
"아닙니다. 제가 게임을 시작하면 여기 카지노 돈을 다 따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랬다간 한국 - 말레이시아 간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으니 사양하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우리가 출장 때문에 여기 온 건데, 갑자기 CNN에 출연이라도 하면 곤란하지."
저는 사실 이런 게임에 소질도 없고, 별로 즐기지 않습니다. 예전에도 친구들과 놀러 가 고스톱이라도 치면 탈탈 털리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구경은 좋아합니다. 카지노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다른 분들 게임하는 거 구경하다가 돌아왔더니 작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VVIP룸 가겠다던 분은 돈을 다 잃었는데, 카지노에 처음 오신 분이 돈을 따고 계셨습니다. 남은돈 200 링깃. 이율 100%. 이게 바로 초심자의 행운. 문제는 지폐를 넣을 때는 잘만 받아먹던 룰렛 머신이 딴 돈을 내놓으라 하니 갑자기 무슨 카드를 넣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카지노 직원을 찾아가서 물으니, 전자 게임기로 게임을 즐기신 경우 돈을 인출하려면 카지노 멤버십 카드를 발급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사님, 판돈을 찾으려면 카지노 멤버로 가입하여 멤버십 카드를 발급 받아야 한다는데요?"
"뭐? 카지노 멤버를 가입해야 한다고? 게임 시작할 땐 그런 얘기 없었잖아?"
이게 바로 올 땐 니 맘대로 와도 갈 땐 맘대로 못 간다 같은 걸까요?
"여튼 그렇다는데요?"
"아.. 그럼 어쩌지?"
"야~ 야~ 귀찮게 뭘 카지노 멤버십을 가입해. 그냥 마지막으로 아무 데나 걸고 가자."
고참 두 분에 룰렛 게임 베팅 화면에서 아무렇게나 터치를 하여 200 링깃을 모두 베팅하였습니다. 이윽고 룰렛이 돌아가고, 버린 200 링깃이 350 링깃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10만 원 남짓 되는 돈.
"게임 좀 더 하고 계셔 보세요. 제가 멤버십을 가입해 보겠습니다."
"그래~ 니가 수고 좀 해라~"
카지노 인포메이션에 갔더니, 멤버십 가입은 카지노 밖에 멤버십 센터에서 가능하다고 친절하게 가르쳐 줍니다. 물어물어 멤버십 센터에 가서 여권을 제시하고 주소와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고,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으니 멤버십 카드가 발급되었습니다.
두 분이 계신 룰렛 머신으로 돌아와서 제가 새로 발급받은 따끈한 겐팅 카지노 멤버십 카드를 넣으니 그동안 딴 돈이 멤버십 카드로 옮겨집니다. 300 링깃. 이 카드를 가지고 환전소에 가니, 그제야 300 링깃을 내어줍니다. 흠, 앞으로 저는 한번 왔다 하면 가져온 돈의 200%를 따가는 위험인물로 인식되어, 전 세계 카지노의 블랙리스트에 올랐을지도 모르겠네요.
고참들 모시고 말레이시아 출장 갔다가, 귀국하는 날 갑자기 예상치 못한 여유가 생겨서 고참 모시고 카지노에 잠시 들렀던 후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쿠알라룸푸르 출장, 비행기 타기까지 한 대여섯 시간 남았는데 뭐 할지 모르겠다? 박물관, 쇼핑 뭐 이런 건 별로 관심 없다? 그냥 빈둥거리기는 좀 아깝다? 그렇다면 겐팅 하일랜드에 한번쯤 들러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