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현실적이고 만족스러운
영화를 엄청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혼자서 문화적인 것을 즐기는 사람도 아니다. 어쩌면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것을 이제야 발견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라도 알아서 반갑다는 마음도.
서른 살까지 서울(한쪽 구석)에 살다가 결혼하면서 서울 북쪽의 경기도로 거처를 잡았다. 별다를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역세권'의 개념을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10년 전쯤 경기 남부로 이사 온 후 서울과 경기도의 차이를 절감하며 서울에 가는 일은 더욱 줄었고, 간다 해도 강남 쪽에 국한됐다.
그사이 내 신상도, 관심사도, 만나는 사람들도 많이 달라져서, 내가 느끼는 격세감이란 게 꼭 사는 지역 때문은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난여름, 아트나인에서 대략 8시간을 보내며 만족감과 감흥에 흠뻑 젖어서는 좀 궁금하긴 했다. 내가 지금 왜 이렇게 좋은 거야?
꼭 봐야 할 영화를 집 근처(라고 해봤자 자차로 15-20분 거리) 영화관에서 볼 수 없었고, 강남권도 마찬가지였다. 교통편을 따지며 동심원을 넓히다 이수역에 있는 아트나인을 찾았다.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영화 러닝타임과 비슷했다. 돌아오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영화 외적인 요소로) 영화에 불필요한 기대를 하지 않으려면, 오랜만에 서울까지 간 김에, 영화를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해보니 상영관은 두 개이고, 멀티플렉스에서 볼 수 없는 볼 만한 영화(예술영화거나 독립영화거나)들이 적당한 시간 차를 두고 계속 상영하는 모양이었다. 볼까 말까 하다 포기해버린 영화도 있었고, 얼핏 누군가 추천했던 영화도 보였다. 세 개를 볼까나?
걸리는 건 끼니였다. 굶으면서까지 연이어 영화를 볼 수는 없고, 식당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래야 한다면 영화를 줄이고 다른 일정(누군가를 만나거나 근처 다른 곳에 가거나)을 짰을 것이다. 그런데 티켓박스와 식당('잇나인')이 같이 있네?
메뉴를 보니 식사와 간식, 디저트, 음료 모두 있었다. 그리고 평도 나쁘지 않았다. 좋았어!
토요일 아침, 남편에게 세 아이를 맡기고 이수역으로 출발. 도착해서 간단한 브런치를 후딱 먹고 영화 한 편, 나와서 야외 라운지에서 한숨 돌린 다음 영화 한 편, 그리고 커피와 스콘 먹은 후 영화 한 편. 마지막으로 저녁까지 먹었다. (모두, 내 기준 먹을 만했다. 여기까지 와서 다른 곳 찾지 않을 만큼, 조금 비싸다 싶지만 기회비용을 따지면 만족할 만큼.)
야외 라운지는 이곳을 두 배쯤 좋은 곳으로 만든다. 영화관도 식당도 좁고 어두웠다. 닫힌 공간에서는 아무리 엔터테이닝을 하는 중이어도 몇 시간 있으면 힘들고 지치게 마련인데,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야외. 한가운데 걸린 커다란 스크린에서는 (늘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바닷속 풍경이 펼쳐졌고, 영화관으로 이어지는 문 말고는 탁 트였다. 고층 빌딩이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하늘을 마주하고 앉을 수 있다. 푹푹 찌는 한여름의 날씨였지만, 나는 그곳에 기꺼이 앉아서 나의 비현실적인 오늘에 대한 상념에 젖었다.
영화들도 모두 좋았고, 버리는 시간 없이 알차게 보냈다. 영화관에서 영화 세 편을 연이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이 나를 이토록 만족스럽게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마도 그냥 이곳이 내게 맞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긴장하거나 놀라울 만큼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고, 적당히 감각적이고 적당히 소박한 이 공간과 분위기가. 그래서인지 이 좋은 곳에 사람들이 숨 막히게 바글거리는 대신 '고인 물'처럼 보이는 십수 명의 사람들이 여유롭고 능숙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들마저 괜히 친숙했다.
지하철 역사에는 심지어 알라딘 중고서점이 있다. 그곳에서 남편과 아이들에게 줄 책들을 사서 돌아가는 길, 아직 2024년이 5개월이나 남았지만, 아마도 더 멋지고 신나고 새로운 곳에 가겠지만, 이토록 만족스러운 하루를 주는 곳은 없을 거라고 나는 단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