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것들의 시차여.
14년 전 첫 아이를 가졌을 때 태교일기를 썼다. 아이가 태어난 후엔 육아일기를 썼고, 둘째를 갖고서는 태교+육아 짬뽕일기를 썼다. 그때 100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태교일기나 육아일기를 쓰면 무료로 출판해주는 곳이 있었다(놀랍게도 아직도!). 이런 사소한 도전에 투지를 불태우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여서, 열심히 썼다.
그리고 일기 쓰기를 깜빡하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스마트폰도 앱도 없던 시절, 아기를 재우다 그 사실이 벼락같이 떠오르곤 했다. 아기는 안 자고, 나는 졸리고, 자정은 다가오고... 아기에게 젖을 물린 채 피로와 잠에 멱살 잡혀 끌려가며 "오빠... 점만 찍어줘..." 부탁하고...
그렇게 근근이 이어갔건만 다시 '오늘부터 1일'이 지겨워진 날에는, 실물 앨범에 몇 줄 글을 보태 나만의 육아일기책을 만들기도 하고, 달마다 사진 책을 내주는 인화 서비스를 이용해 육아일기를 대신하기도 했다.
어쨌든 아기와 나의 이야기를 쓸 때는, 손가락 사이로 부서지는 시간을 애써 붙들어 책이라는 무언가로 매듭지을 때는 몰랐다. 이 글들과 책들의 운명에 대해서. 사실 내게 말을 걸고, 내가 들어주는 일일 뿐이었다. 별별 일이 다 일어나지만, 나에게 말고는 별일 아닌 그렇고 그런 하루를 들고 어찌할 바 몰랐으니까. 언젠가 이런 나날들이 흐릿해질 때 훑어봐야지, 가만히 뿌듯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물론 모든 일기가 그렇듯이, 쓰는 순간 어떤 의미로든 독자의 존재를 상정하게 마련이고, 나로서는 내 아이들이 독자가 될 수도 있겠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날이 그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그리고 이런 모양일 줄은.
책장에서 책을 스스로 꺼내어 읽는 '어린이'가 된 첫째가, 어느 날 나의 육아일기책을 펼쳤다. 나는 잠깐 눈을 끔뻑이며, '6세 열람 불가'인 내용이 있...지 않나? 기억을 더듬었다. 온갖 사랑의 말을 낯간지럽게 퍼부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둘째가 태어나고 나서는 좌절, 비애, 참담, 당혹, 분노, 비관, 우울이 때때로 첫째 아이와의 일화에 엉켜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돼!!!!!" 하고 덮쳐 낚아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는 때때로 웃고, 내게 가져와 사진이나 적힌 내용에 대해 뭐라 말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조용히 탐독할 뿐이었다. 다 읽으면 다른 걸 꺼내서 탐독. 탐독, 탐독, 탐독.
기분이 묘했다. 재미있나? 알아들었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궁금하긴 했지만, 내 앞의 다른 두 아이와 내가 감당할 일들이 무지막지했으므로,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첫째는 때때로 또 꺼내어 읽었고, 그럼 동생들도 옆에서 건너다보다가, 손에 잡고 보다가 그랬다. 무슨 유행처럼 2-3년에 한 번쯤 그렇게, 그 책들이 몽땅 꺼내어져서 아이들 손에서 손으로 돌려 읽혔다.
그리고 열흘 전. 이제 어엿한 사춘기 소녀 12세 둘째가 책을 꺼내들었다. 이번에도 주섬주섬, 첫째와 셋째도 다른 책들을 펼쳤다. 잠시 후 한참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던 셋째가, 왜 내 책은 없냐며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올 게 왔구나, 나는 그간 대충 생각해놓은 응당한 이유를 말했다. "엄마가, 너를 키울 때는 정말 일기 쓸 시간이 없었어..." (“맞아, 내 책도 한 권뿐이야.” 둘째가 거들었다.)
하지만 그건 내 사정이었고, 아이는 전혀 설득되지 않았다. 나는 될 만한 이야기를 다 꺼냈다. "대신 막내라서 언니들이 너의 모습을 기억하잖아. 또 동생이 없어서 엄마랑 제일 오래 잤고..." 그런 말들이, "언니들은 수영학원도 다녔는데 난 안 보내주고...", "야, 너는 1학년 때 생일파티 했잖아, 나는 6학년 때 처음 했어", "그리고 너는 게임도 일찍 시작했어. 나는...", "언니는..." 그렇게 엉뚱하게 첫째, 둘째, 셋째 논쟁으로 번졌고, 결국 이래저래 셋째는 엉엉 울었다. 아이를 꼭 안고 한참을 달랬다.
어쨌거나 둘째는 언니의 태교일기부터 차근차근 꺼내어 읽으며, "엄마, 이게 만화책보다 더 재밌다!"고 말했다. 생글생글 빛나는 아이의 눈을 보며, 그래, 쓰길 잘했지,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네, 가슴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그때 아이가, 서서히 다가오는 자신의 이야기를 기다리며 설레한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이틀쯤 지나, 둘째 아이가 책을 탁 내려놓더니 말했다.
ㅡ2호: 제목이 <2호와 함께 100일>인데, 다 1호 이야기야. 사진도 다 1호고.
ㅡ나: 음? 그런…가?
ㅡ2호: 이거 봐. 여기도 1호, 저기도 1호, 1호, 1호... 내 이름은 제목에만 있어.
가만 보니 정말 그랬고, 그러고 보니 둘째는 훌쩍이고 있었다.
ㅡ나: 아니, 그게... 너는 엄마 옆에서 젖 먹고 잘 자고 있고... 언니는 갑자기 신세가... (하루종일 엄마랑 꼭 붙어지내다 동생 나오고…)
ㅡ2호: 10월 15일 화요일, 1호가... 봐, 또 1호. 화요일이 나보다 낫네.
눈물방울을 뚝, 뚝 흘리는 둘째 옆에서 첫째가 무심히 말했다.
1호: 2호 책인데 왜 내가 읽으면서 슬픈가 했더니, 그래서 그랬구나~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하고 있는데, 셋째가 옆에서 덧붙였다.
ㅡ3호: 난 아예 없어.
나는 한편으론 웃음이 터졌고, 한편으론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 모든 것들의 시차여.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이 브런치의 글들이 떠올랐고, 다음날 아이들에게 가만히 말할 수 있었다. "이게 다가 아니야. 엄마가 계속 쓰고 있어. 나중에 보여줄게." "정말?" 눈을 빛내며 말개진 얼굴들을 보았으니, 건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