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 한 번이면 순식간에 지브리 스타일의 일러스트가 그려지고, 나열된 단어 몇 개 만으로 기승전결을 갖춘 소설 한 편이 탄생하는 시대.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왜'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미 세상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나보다 잘 그리고 쓰는 사람들이 모래알처럼 차고 넘쳤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뼈저리게 고통스러웠는데, 이제는 프로그램까지 나보다 훌륭한 글을 써낸다는 사실은 뼈가 저린 것을 넘어 이제는 정말 펜을 꺾어야 할 시기가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나에게 글을 쓰는 건 숨을 쉬듯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의 글쓰기는 늘 '어떻게'의 문제였다. 내가 생각하고 느낀 것을 어떻게 써야 다른 사람들에게 생생히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어떤 단어를 쓰는 게 더 좋을지, 어떻게 써야 더 큰 울림이 있을지를 생각하는 게 내 일상이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왜'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마주하게 되자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처음 생성형 AI가 등장했을 땐 AI 산출물 특유의 어색한 점(뒤틀려있는 손 그림, 반말과 존댓말이 뒤섞여있는 문장 등)을 짚어내며 '역시 창작 분야는 기계가 인간을 따라올 수 없지.'라며 의기양양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금은 길을 걸으며 보는 광고물 하단에 'AI를 활용한 사진, 영상이 사용되었습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당연하단 듯 적혀 있고, 간단한 자기소개서부터 복잡한 논문까지 AI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제는 여러 공모전이나 대회에서 좋은 작품을 고르는 것과 함께 AI를 사용하지 않은 작품을 고르는 게 새로운 과제가 되어 버렸다.
이토록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점점 자신감을 잃고 작아지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 나는 내가 '왜' 쓰는지를 되묻기 시작했다. 아무리 고민해도 이렇다 할 해답은 떠오르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쓰는 글이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의미가 없는 글을 계속 써 나가야 할 이유가 있나?' 새로운 질문들만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그러던 중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이 막막한 질문에 접근해 보기로 했다. 내가 매일 해오던 그 행위 '쓰다'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국어사전에 '쓰다'를 검색하자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쓰다 찾기 결과
1. 「동사」 붓, 펜, 연필과 같이 선을 그을 수 있는 도구로 종이 따위에 획을 그어서 일정한 글자의 모양이 이루어지게 하다.
2. 「동사」 어떤 일을 하는 데에 재료나 도구, 수단을 이용하다.
2-1. 어떤 일에 마음이나 관심을 기울이다.
2-2. 어떤 일을 하는 데 시간이나 돈을 들이다.
3. 「형용사」 혀로 느끼는 맛이 한약이나 소태, 씀바귀의 맛과 같다.
...
(출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이 단순한 정의들이 갑자기 낯설고도 재미있게 다가왔다. 나는 '쓰다'라는 두 글자 속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하나씩 꺼내 보며, '글을 쓴다'라는 행위를 다시 해석해 보기로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작가의 '쓰디쓴' 기억을 꺼내어 시간을 '쓰며' 글자를 '쓰는'일이다. 그런 글을 읽는다는 것 역시, 마음을 '쓰며' 타인의 내면과 시간을 받아들이는 행위다."
이런 나의 해석에 따른다면 AI는 글을 생성해 내는 존재가 될 수는 있어도, '진정으로 쓰는 존재'는 될 수 없다. 그 과정 속엔 쓰디쓴 기억도, 마음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창작이란 단순한 정보의 조합이 아니다. 그것은 창작자의 삶의 궤적, 경험, 감정이 녹아 있는 결과물이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다루더라도 누군가는 그 속의 슬픔에, 누군가는 분노에, 또 누군가는 희망에 대해 쓴다. 독자들도 각자의 경험에 따라 같은 글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같은 작품을 보고도 어떤 이는 그리움을 느끼고, 어떤 이는 불쾌함을 느끼기도, 또 어떤 이는 환희를 느낀다. 작품이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느냐는 것은 결국 '누가 썼는가?'와 '누가 읽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교류이다.
생성형 AI의 발전은 분명 창작의 문턱을 낮추었다. 누구나 쉽게 '그럴듯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진짜 창작자들의 의미를 흐리게 만든다. 우리는 이제 '그럴듯한' 것 이상의 것을 고민할 때가 되었다. 이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 왜 이런 작품을 쓰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해 결국 마지막엔 '이 작품엔 사람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AI가 생성한 문장은 모두의 삶과 닮은 듯 보이지만 사실 누구의 삶도 담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쓰는 글은 나를, 너를 그리고 우리를 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글을 쓴다. 더 잘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만의 방식으로 삶을 해석하고, 기억을 꺼내고, 마음을 쓰기 위해. 우리는 여전히 써야만 한다. 인간이 글을 쓰는 것 그 자체의 고유한 의미를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 글을 읽을 단 한 사람을 위해.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여전히 글을 쓸 이유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