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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셔닝은 어떻게 마케팅의 모든 것을 바꾸었나

마케팅은 제품을 파는 싸움이 아니다. 이건 순전히 '인식'의 전쟁이다.

by 생존일기

최근 여러 권의 마케팅책을 추천받았다

그때마다 가장 먼저 읽어봐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 책이 있다.

바로 알리스와 잭 트라우트의 포지셔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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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포지셔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보고자 한다.


1970년대 알 리스(Al Ries)와 잭 트라우트(Jack Trout)가 '포지셔닝(Positioning)'이라는 개념을 던졌을 때, 많은 이들이 혼란에 빠졌다고들 한다. 그들의 주장은 단순하지만 급진적으로 보인 모양이다.


“포지셔닝이란 제품에 어떤 행동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 고객의 마인드에 어떤 행동을 가하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이 전쟁터에서는 '현실'이 중요하지 않다. 오직 '인식'만이 유일한 현실이다. R&D 부서가 아무리 뛰어난 제품을 만들어도, 고객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걸로 끝이다.

선택과 판단에 대한 키가 '제품'을 쥔 조직 내부가 아니라, '인식'을 이해하는 외부, 즉 고객의 마인드로 이미 넘어갔다는 이야기다.


포지셔닝 이론이 등장하기 전, 마케팅의 역사는 크게 두 가지 분기로 생각해볼 수 있다.

제품의 시대 (1950년대): 단순히 '더 나은 제품’'을 만들고 그 특징과 혜택을 알리면 이기던 시대.

이미지의 시대: 더 나은 제품만으로는 안 되자, 기업들이 '평판'과 '이미지'에 집중하기 시작한 시대.


하지만 1970년대가 되자, 이 두 가지 무기 모두 먹히지 않기 시작했다. 왜? 세상이 너무 시끄러워졌기 때문이다.

알 리스는 이 시대를 ‘정보 과잉 사회'라 정의했다. 너무 많은 제품, 너무 많은 기업, 너무 많은 마케팅 '노이즈'. 이 소음의 홍수 속에서 소비자의 마인드는 방어 기제를 켜기 시작했다.

인간의 마인드는 본질적으로 변화를 거부한다. 새로운 정보는 적극적으로 '차단'하고, 오직 자신의 기존 지식이나 경험과 일치하는 것만 '필터링'해서 받아들인다. 일단 한번 인식이 형성되면, 그걸 바꾸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 단단한 방어벽을 뚫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일까? 그들은 '극도로 단순화된 메시지'뿐이라고 주장한다. "Less is more." 복잡한 기능 설명은 그저 혼란을 야기하고 메시지를 희석시킬 뿐이다. “이 시대에 마케팅의 첫 번째 적은 경쟁사가 아니라, 메시지 전달 자체를 가로막는 이 '노이즈' 그 자체다.”


마인드를 여는 4가지 열쇠

그렇다면 그들은 이 단단한 마인드의 성문을 어떻게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포지셔닝의 핵심 원칙은 4가지로 요약된다.

1. 최초가 되라

사람들의 마인드에 들어가는 가장 쉬운 길은 '첫 번째'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함정은 '시장에서의 최초'가 아니라는 점이다. '마인드 속의 최초'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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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은 컴퓨터를 '발명'하지 않았지만(최초는 Sperry Rand), 잠재 고객의 마인드 속에 '컴퓨터'라는 포지션을 구축한 '최초'의 회사였다. 코카콜라(음료)나 제록스(복사기) 역시 기술적 1등이 아니라 '인식 속 1등'이 되어 모든 것을 가져갔다.

2. 마음속 사다리를 찾아라

소비자는 정보를 효율적으로 분류하기 위해 '사다리' 구조를 사용한다. 각 제품 카테고리는 소비자의 마음 속에 하나의 사다리로 존재하며, 브랜드들은 그 디딤대에 순위별로 위치한다.

예를 들어, 렌터카 사다리 1층엔 헤르츠가, 2층엔 에이비스가 있다. 마케팅 전략의 핵심은 이 사다리에서 우리 브랜드가 지금 몇 층에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3. '하나의 단어'를 소유하라

가장 성공적인 전략은 브랜드와 '특정한 단어'를 강력하게 연결하는 것이다. 성공하면 브랜드 이름이 카테고리의 동의어가 되기도 한다. (예: 클리넥스 = 티슈,스테이플러 = 호치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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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인 사례는 볼보(Volvo)다. 볼보는 수십 년간 오직 '안전(Safety)'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를 소유하기 위해 '섹시한 디자인'이나 '강력한 스피드' 같은 다른 모든 매력적인 속성들을 과감히 희생했다.

4. '발명'이 아닌 '발견'이다

포지셔닝은 "우리 제품은 이렇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고객의 마인드에 이미 무엇이 있는가?"에서 출발하는 '역방향 사고(thinking in reverse)'를 요구한다.

이는 새로운 개념을 '발명'하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고객의 마인드 속에 싹트고 있는 인식을 '발견'하는 작업이다. 마케팅은 고객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이미 가진 믿음에 '공명'하는 메시지를 찾는 것이다.


전설이 된 4가지 포지셔닝 전략 (feat. 사례 연구)

이 원칙들은 실제 전쟁터에서 어떻게 쓰였을까? 4가지 핵심 전략과 전설적인 사례들을 통해 그 위력을 확인해 보자. (책이 쓰여진 시기를 고려해주시길 바란다.)


전략 1 & 2. 리더의 방어, 그리고 추격자의 반격

마인드 속 1등 ’리더’의 전략은 간단하다. "내가 원조다", "내가 표준이다"라며 자신의 리더십을 계속 강화하면 된다.

문제는 2등 ’추격자’이다. 1등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거는 것은 "터무니없이 어려운 일"이며 자원 낭비일 뿐이다. 2등은 1등이 차지하지 못한 '비어있는 위치'를 찾거나, 아예 1등에게 '명시적으로 연관' 지어 자신의 위치를 확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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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1: 에이비스(Avis) 렌터카 - "We Try Harder" 1960년대 렌터카 시장은 헤르츠가 부동의 1위였다. 점유율 10% 미만의 미미한 2위였던 에이비스는 역사적인 캠페인을 시작한다.
"We Try Harder." (우리는 더 노력합니다)
이것이 천재적이었던 이유는, 스스로 "우리는 2등입니다"라고 인정하는 진솔함을 보인 동시에, 1등 헤르츠를 "1등이라서 (노력하지 않는) 만족하고 무관심한" 존재로 교묘하게 '리포지셔닝'했기 때문이다. 이 슬로건은 단순한 광고가 아니라, "2등이니까 더 잘해야 한다"는 내부적 동기부여로 이어져 실제 서비스 품질까지 향상시켰다. 결과는? 점유율은 단기간에 30% 이상으로 폭등했다.


전략 3. 경쟁자의 사다리를 무너뜨려라(리포지셔닝)

때로는 2등 전략보다 더 공격적인 '경쟁자 리포지셔닝'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가 더 좋다"고 주장하는 단순 비교 광고가 아니다. "당신의 제품이 아닌, 경쟁사의 제품에 대해 고객이 마음을 바꾸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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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2: 세븐업(7-Up) - "The Uncola" 당시 음료 시장의 사다리는 '콜라' 카테고리가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사이다인 7-Up은 이 사다리에 올라갈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콜라가 아닌 것'으로 정의했다.
"The Uncola." (언콜라)
이 한 단어는 '콜라'라는 강력한 리더의 인식을 정면으로 역이용했다. "콜라"를 '전통적/구식' 음료로 리포지셔닝하는 동시에, 7-Up은 '콜라의 대안'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의 '최초'이자 '리더'가 되었다.


전략 4. "크레뉴를 찾아라" (틈새 포지셔닝)

'크레뉴(Creneau)'는 "틈새(hole)"를 찾으라는 프랑스어다. 리더와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시장의 '빈틈(niche)'을 찾아 그곳에서 작은 연못의 큰 물고기가 되는 전략이다. 정보 과잉 사회에서는 '모두를 위한 함정'을 피하고 명확한 틈새를 공략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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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3 & 4: 틈새공략

폭스바겐(VW): 디트로이트의 거대 기업들이 '더 크고 긴 차'에만 몰두할 때, 폭스바겐은 '크기'의 틈새를 발견했다. "Think Small"이라는 전설적인 슬로건은 '소형차'라는 포지션을 최초로 점유했다.


말보로(Marlboro): 필립 모리스는 담배 시장에서 '성별'이라는 틈새를 발견했다. 기존의 여성적 이미지를 버리고 '남성성'을 극도로 강조한 마케팅을 통해 시장 5위에서 1위로 도약했다.


포지셔닝이 실패하는 두 가지 함정

이토록 강력한 포지셔닝도 잘못 쓰면 브랜드 전체를 무너뜨린다. 가장 흔하게 빠지는 두 가지 함정이 있다.

1. '라인 확장의 함정(The Line Extension Trap)'

코카콜라가 성공했다고 해서 '다이어트 콜라', '체리 콜라', '코카콜라 제로'처럼 성공한 기존 브랜드 이름을 관련 없는 신제품에 무분별하게 확장하는 전략이다.

이 전략은 신제품 광고비를 아끼고 '단기적인 판매 증대'를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원래 브랜드가 마인드 속에 차지했던 '명확하고 단일한 포지션'을 '희석'시키고 혼란을 야기하여 브랜드 자산 전체를 훼손한다. 이는 마케팅 논리가 아니라 '단기 재무 효율성'이라는 내부 논리가 이길 때 발생하는 필연적 참사다.

2. '모두를 위한 함정(The Everybody Trap)'

틈새를 공략하는 것을 거부하고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것"이 되려는 전략이다.

정보 과잉 사회에서 '모두'를 타겟으로 하는 메시지는 '아무'에게도 닿지 않는 '흐릿하고 잊기 쉬운' 메시지가 될 뿐이다. 이는 결국 시장에서 어떤 명확한 포지션도 구축하지 못하는 실패로 이어진다.


알 리스와 잭 트라우트의 이론이 나온 지 약 50년이 지났다. 누군가는 낡은 이론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포지셔닝 개념은 오늘날 현대 마케팅 전략의 가장 근간이 되는 S-T-P (Segmentation-Targeting-Positioning: 시장 세분화-타겟팅-포지셔닝) 접근법의 확고한 초석(P)이 되었다.


1981년에도 시장이 '붐볐다'면, 21세기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시대의 시장은 '극도로 포화 상태'다. 인터넷의 등장은 우리 사회를 "그 어느 때보다 더 정보 과잉 상태"로 만들었다.


따라서 마케팅 '노이즈'를 뚫고 들어가기 위한 포지셔닝 전략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며, 생존을 위해 더욱 좁은 초점과 '단 하나의 포지션'을 요구한다.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고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결국 최후의 승리는 잠재 고객의 마인드 속에 '가장 명확하고', '가장 단순하며', '가장 차별화된' 단 하나의 '위치'를 선점하는 자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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