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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일 Feb 02. 2021

자기를 모르는 사람들

비교의 교육, 수치심, 그리고 창의성의 부재

미국에서 박사를 하면서, 저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한국에서 온 조기 유학생들에게 토플과 SAT를 가르치는 과외 교사로 지난 몇 년간 일했었습니다. 제가 가르쳤던 학생들의 나이는 중학교 2-3학년부터 고 3까지, 매우 다양했고, 그 아이들의 성격이나 취향, 관심사도 모두 달랐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그 아이들 모두가 자기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전혀 몰랐을 뿐 아니라, 정말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는 마음도 별로 없었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그 아이들 대부분은 자기가 왜 미국에 와서 공부를 하고 있는 건지에 대해서도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힘들고 외로운 미국 생활을 벗어나서 다시 부모님이 계신 한국에서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고 싶다고 말했던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흥미로웠던 점은, 그 아이들의 부모님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저에게 아이들을 맡기셨던 모든 부모님들이 항상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그저 시험 성적을 올려달라는 주문을 빠짐없이 하셨다는 겁니다. 제가 과외 교사로 고용된 것이었고, 과외 교사에게 시험 성적 올려달라는 얘기를 하는 게 전혀 문제 될 것도 없고,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만, 그분들에게 제가 받은 인상은, 자녀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꿈이 있는지를 들어보고 싶어 하기보다는, 자녀가 어떻게 하면 시험 잘 보는 능력을 키워서 다른 이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게 할 수 있을까에만 관심이 많아 보였다는 겁니다. 


시험 점수를 올리는 교육은 다른 이들과의 비교를 기반으로 하는 교육입니다. 시험 점수를 올리는 교육은 자녀 개개인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잠재성을 가지고 태어났고, 어떤 식으로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브레네 브라운은 다른 이들과의 비교는 필연적으로 수치심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왜냐고요? 비교는 '지금의 내 상태가 부족하다'는 인식을 조장하고, 그런 인식은 곧바로 수치심, 즉 '나는 무언가 더 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는 존재구나'라는 감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네가 부족해서 그래' 문화는 하룻밤 사이에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수치심을 조장하는 문화에서는 늘 뭔가 부족한 느낌이 빠른 속도로 확산된다. 사람들이 비교하는 습관에 젖어 있는 데다 진정 어린 참여가 없어서 사회가 파편화하기 때문이다.(여기서 '수치심을 조장하는 문화란 사람들이 그 사회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수치스럽게 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다수 구성원들이 그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에 자신을 맞추지 못해서 힘겨워하다는 뜻이다.)'  (브레네 브라운, 마음 가면 중에서)


비교하는 교육은 수치심을 낳습니다. 그런데 역으로, 수치심이 커지면 다른 이들의 나에 대한 시선과 평가에 더 민감해집니다. 당연하겠지요. 다른 이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민감해지면 어떻게 될까요? 일단 내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 그들이 나를 더 좋게 봐줄까에 관심이 집중됩니다. 그래서 그 기준을 찾아내면 그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추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시험 점수에 집중하는 교육은 사람을 그렇게 만들지요. 남들의 기준이 내가 누구인지보다 더 중요한 교육. 살아남기 위해서 거기에 나를 맞춰야만 하는 교육. 이런 교육을 받다 보면 자연스레 내가 정말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어지게 마련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잘 몰라도, 무조건 점수를 잘 받으면 사람들이 인정해 주니까요. 내가 정말 관심 있는 것들은 일단 뒷전으로 제쳐두고, 지금 당장 급한 점수를 올려야 사회에 나가서 그나마 먹고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만난 조기 유학생들 대부분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몰랐습니다. 워낙 나이가 어려서 그런 거 아니냐고 되물으실 분도 계시겠습니다만, 적어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계속해서 스스로 묻고 찾아가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조차도 없어 보였다는 게 제가 가졌던 안타까움입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면 남들이 말하는 대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혹시 늦게라도 자기가 정말 누구인지 알게 되고, 좀 더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하는 여정을 걸어가게 된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만, 만약 제가 가르쳤던 그 아이들이 자신이 가진 잠재성과 가치를 그냥 그대로 묻어버리고 세상의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춰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면 그건 단지 그 아이들 개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큰 손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각은 다른 이들과는 '비교' 불가능한 잠재성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런 잠재성은 잘 발견되고 풍성하게 키워진다면, 사회 전체에 놀라운 기여를 할 수 있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융인으로 잘 알려진 존 리 대표는 4차 산업 혁명 시대 창업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교육만이 부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라고 역설합니다.  


왜일까요. 창의성이란 남들과 다르게 생각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려면 1)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잘 알아야 하고, 2) 세상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도 민감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세상의 필요를 알아차리는 능력은 사람들과 시대를 자세히 관찰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런 관찰이 내가 가진 능력과 잠재성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자기 인식과 만나게 되면 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탄생합니다. 그래서 사실 4차 산업 혁명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란 수치심이 없는 인재, 창의성이 풍부한 인재,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의 필요를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그들을 위해서 어떤 것이 필요할지를 고안해 낼 수 있는 인재입니다.  


교육이란 개인 안에 숨겨진 그런 잠재성을 키울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교육은 먼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우리 안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우리가 정말 누구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우리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 없어야 합니다. 수치심은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며, 그런 것들을 되도록 살펴보지 않고 그냥 다른 이들의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추라고 말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일은 수치심이 적을수록 더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이들의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추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우리 아이들이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가 가진 것들만으로도 충분하며, 오히려 스스로 가진 것들을 발견하고 활용해서 세상에 유익을 끼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현대 사회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도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나를 깊이 성찰해 본 경험을 가진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어떤 곳인지, 세상의 필요가 무엇인지도 더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교육이 나아갈 방향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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