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기다리는 여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중고등학생 시절 선생님들은 나를 두고 욕심이 많은 아이라 평가했다.
당시에는 이 말이 이해도 가지 않을뿐더러 마치 비판하는 말처럼 들려 참 싫었다.
욕심의 반대말은 양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욕심이 많다는 건 양보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생각했다.
그 이후로 십 년이 지났다.
이제야 나는 내가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욕심이 많다.
일도 잘하고 싶고, 가정도 잘 돌보고 싶고, 좋은 아내가 되고 싶고, 좋은 딸이 되고 싶고, 좋은 엄마가 되고 싶고, 취미 생활도 하고 싶고, 그 와중에 여유와 행복은 놓치고 싶지 않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이상주의자가 따로 없어 보인다.
내가 이상주의자라 치자.
그럼 안 되는 걸까?
그렇다면 내가 나열한 것들 중 나는 무엇을 포기해야 할까?
아니, 무엇을 포기할 수 있을까?
고민의 시간 끝에 나는 욕심이 많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가진 욕심은 내 삶의 지향점이자 나의 동력이다.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거나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욕심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아이를 가지기로 결정한 이상, 내가 자궁을 가진 여자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무려 10달의 시간 동안 아이를 품어야 하고,
아이가 세상에 나온 후에는 내 몸과 내 몸에서 나온 작은 생명체를 돌보아야 할 책임을 가지게 된다.
이 사실은 언제나 그렇듯 내 마음을 촉박하게 한다.
하루빨리 원하는 성취를 이루어 내 커리어를 궤도에 올려놓고 싶고,
아이가 세상에 나왔을 때에는 이를 유지하며 아이에게 더 많은 에너지를 쏟고 싶다.
욕심 그 자체라는 거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그게 나인걸 어쩌겠는가.
임신을 계획하는 중 커리어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회사에서는 보직이 바뀌었고, 개인적으로는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 모든 일들을 겪으며 차일피일 미루어져 가는 임신 계속을 보며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미 노화가 시작된 몸뚱어리와 아마도 더 빠르게 나이 들어가고 있을 내 자궁을 생각하면 조급함이 밀려온다.
비슷한 시기 임신을 계획했던 이들이 벌써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이렇게 마음이 어지러워질 때마다 나는 이 모든 순간을 받아들이자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내가 가진 욕심도 나의 일부이고, 이에 따르는 조급함과 불안함도 결국 내 일부니까.
스스로를 부정하며 괴로워하느니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내면의 소리를 따라가보기로 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꿈꾸는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되뇌며 나는 나의 길을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