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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룽지조아 Apr 07. 2024

81. 작용하나 없는 도와 베푸나 놓아주는 덕은 같다

도덕경 제1장

道는 道字가 가능하나,

불변의 道字는 아니다.

이름은 이름이 맞지만,

불변의 이름은 아니다.


도를 굳이 이름 붙이면 없음과 있음이다.

없음(도)은 세상을 낳는 시작이라 부르고,

있음(덕)은 만물을 기르는 어미라 부른다.


그래서

영구 불변하는 없음(도)이라 부르려고 하지만

없는데 있음처럼 작용하는 도의 오묘함을 보고,

영구 불변하는 있음(덕)이라 부르려고 하지만

덕을 베풀고 놓아주어야 비로소 덕이 있으므로

있는데 없음처럼 놓아주는 도의 심원함을 본다.


이 둘은 나타냄은 같으나 부름이 다르다.

똑같이 오묘하고 심원함을 말하는 것이고,

오묘하고 심원하고 또 오묘하고 심원하다.


없음(도)과 있음(덕)은 셀 수없이 많은

오묘하고 심원함으로 드나드는 문이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無, 名天地之始. 有, 名萬物之母.

무, 명천지지시. 유, 명만물지모.

故常無, 欲而觀其妙. 常有, 欲以觀其徼.

고상무, 욕이관기묘. 상유, 욕이관기요.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차양자등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衆妙之門.

중묘지문


도라고 쓰는 글자와 부르는 이름은 영원하지 않다. 도를 굳이 글자나 이름 붙이면 무(無)와 유(有)다. 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무(無)인 도가 천지를 낳기 때문이다. 유라고 하는 이유는 유(有)인 도(덕)가 만물을 기르기 때문이다. 영구불변의 무라고 부르려고 하지만 없는데 있음처럼 작용해 영구불변의 무라고 부를 수 없다. 영구불변의 유라고 부르려고 하지만 있긴 한데 없음처럼 놓아주어야 비로소 있기 때문에 영구불변의 유라고 부를 수 없다. 없는데 있는 거나 있는데 없는 거나 모두 같고, 오묘하고 심원하다. 무와 유(또는 도와 덕)는 오묘하고 깊어 득도의 경지에 들어가는 문이다. 도란 무엇인가? 즉 자연의 이치란 무엇인가? 노자가 자기 생각을 들려준다.


'도는 글과 말로 전달할 수 없다.'

실질을 글과 말로 개념화하면 실질과 이름이 분리된다. 도는 반대되는 여러 모습을 지녀 오묘하고 심오하다. 이런 특성을 가진 도를 정확히 글과 말로 개념화하여 표현하기 어렵다. 또한 개념화하는 순간 실질이 이름과 분리되고 형상(相)이 고정된다. 예를 들면 빨간 건물이라고 이름 지으면 그 건물의 속성과 상관없이 형상이 고정되어 버린다. 빨간 건물에 파란 페인트를 칠하면 파란 건물이다. 그러나 빨간 건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실질과 이름이 따로 논다.


글과 말로 개념화한 도(‘이름 붙인 도’)로는 도의 본질을 전달할 수 없다(불립문자不立文字). 깨달음과 깨달음에 대한 표현은 별개다. 글과 말로 도를 다 표현하지 못하므로 글과 말에 집착하지 않는다. 진리는 직접 체험하여 마음으로 깨달을 때 도달할 수 있다. 도는 말과 글 이외의 특별한 전달방법인 마음으로 전달할 수 있다(교외별전敎外別傳). 글이나 말로 설명하는 이유는 한 수 가르치기 위한 임시방편이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을 어떻게 해석할까? 道字가 3번 나오고 이름(名)이 3번 나온다. 위 문장은 대구 관계에 있어 동일하게 번역했다. 3번 나오는 도(道)가 도의 실질을 말하는지 글자나 이름을 말하는지 모호하다. 첫 번째 도(道)는 도의 실질, 그 이후 2개의 도를 나타내는 이름이나 글자로 해석해 道字로 번역했다. 예를 들어 ‘빨간 건물을 빨간 건물이라 할 수 있지만 불변의 빨간 건물은 아니다.’라는 문장을 해석한다고 하자. 처음 빨간 건물은 실질이고, 뒤에 나오는 빨간 건물은 이름이다. 빨간 건물에 파란색을 칠할 수 있으므로 불변의 빨간 건물은 아니라는 의미다.


비상도(非常道)를 ‘영구불변의 도’가 아니라는 해석보다 ‘도라는 이름(道字)이 영구불변한 이름(道字)’이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도를 굳이 문자로 표현한다면 무와 유다.'

무는 만물을 낳는 시작이고 유는 만물을 기르는 어미라는 표현을 뒷장에서 도가 만물을 낳고 덕이 만물을 기른다고 했다(51장). 무는 도(본질, 본체(體), 이(理))고, 유는 덕(현상, 작용(用), 기(氣))에 해당한다. 도가 만물을 통해 발현되는 현상이 덕이다(21장).


'도는 무와 유의 모호한 양면성이 있다(무와 유의 꼬임).'

도와 덕은 ‘무’이기도 하고 ‘유’이기도 하다. 무와 유는 공존하고 관계를 맺는 존재다. 영구 불변하는 무라고 부르려 하지만 무가 있는 것(진공(眞空))처럼 느껴져 오묘하다. 없다고 생각했는데 작용한다. 만물은 무에서 만들어졌다. 있는 것이 없는 것에서 만들어질 수 없으므로 그 없는 것은 무언가 있는 없음이다. 예를 들면 극상의 리더는 의도적으로 하지 않아 리더십을 행사하지 않은 것 같은데 백성은 스스로 한다. 통치행위를 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리더십이 발휘되니 오묘하다. 무위로 하는 행위는 없음이지만 작용하는 없음이다.


영구 불변의 유라고 부르려 하지만 유가 없는 것(묘유(妙有))처럼 느껴져 심오하다. 덕을 많이 베풀어 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덕을 놓아주어야 비로소 덕이 있다. 만물은 있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없음을 내포하고 있다. 항상 변하며, 죽으면 없어진다. 예를 들면 지식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행위가 ‘복’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흘러 백성들이 약삭빠르게 변해 본성대로 다스리기 어렵게 되었다. 복이 사라져 버렸다. 지식으로 다스리는 행위는 복이지만 없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복이다.


상무욕(常無欲)을 名이 생략된 문장으로 보아 ‘영구 불변하는 무라고 부르려고 한다.’로 해석했다. 상유욕(常有欲(名))에 대한 해석도 같다. 욕심이 없음, 있음으로 해석하는 것은 전체 문맥과 결이 맞지 않다.


'무(도)와 유(덕)는 나눌 수 없는 하나다(체용일원體用一源).'

무(진공眞空)와 유(묘유妙有)가 같다는 말은 무와 유로 표현했지 내용상으로 없는데 작용하고 있는데 놓아주어야 있기 때문에 없음이나 있음은 그 내용이 다르지 않고, 도의 본체인 무는 도의 현상인 유를 통해서만 작용하기에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다.


‘무(도)와 유(덕)를 한 바구니에 담는 연습이 깨달음의 시작이다.’

사람들은 무는 아무것도 없고 유는 있기만 한 유라고 생각한다. 분별심이 있어 ‘있음’과 ‘없음’을 독립된 실체로 가른다. 도를 깨우치기 위해 없음 속에 작용, 있음 속에 없어짐을 보는 연습과 같이 있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노자는 작용이 있는 없음을 통치수단으로 활용한다. 행하지 않는 행함, 말하지 않는 말함이라고 표현했다. 예를 들어 자율성을 강조하는 부모가 말은 안 하고, 책을 읽었다. 부모는 애들에게 공부하라고 명령한 것인가? 노자는 공부하라고 명령하지 않은 명령이라고 표현했다. ① 공부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부모가 애들에게 공부하라고 지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② 공부하라고 명령했다. 부모가 무언이라는 수단을 통해 자녀가 자율적으로 공부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다른 예로 투자하지 않는 투자의 사례다. 100억 원을 주식 투자하는 투자가가 시황이 좋지 않아 주식을 다 팔았다. 이 투자가는 현재 투자하고 있나? 노자는 투자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 팔고 현금을 보유하는 것도 투자하기 더 좋은 때를 엿보고 있어 투자하지 않는 것도 투자라는 논리다. 즉 투자하지 않는 투자를 하고 있다.


도덕경의 문장들은 대립되는 양면을 다 담고 있어 오묘하고 심오하다. 몇 가지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일을 잘하려면 계획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의도적이지 않게 일을 처리한다(2장)
PR 시대이므로 공을 이루고 적절히 내세운다.~> 공을 이루고 자랑하지 않는다(2장)
비어 있으면 작용하지 않는다.~> 도는 비어 있으나 작용한다(4장)
뒷받침하면 알아주지 않고, 자신을 잊으면 잊힌다.~> 뒷받침하니 우두머리가 되고, 자신을 잊어 자신을 보존한다(7장).
금과 옥이 많으면 잘 살 수 있다.~> 금과 옥이 많으면 지킬 수 없다(9장).
가장 뛰어난 것은 아주 유명해 존재감이 돋보인다.~> 가장 뛰어난 것은 있는지도 모른다(17장).
지혜가 없으면 백성이 고생한다.~> 고결함과 지혜를 끊어 버리면 백성은 백 곱절 정도나 이롭다(19장).
인의를 버리면 싹수가 노란 자식과 무례한 부모가 많이 생긴다.~> 인의를 버리면 백성은 효와 자로 되돌아간다(19장).
학문을 끊으면 맨날 꼴찌 하여 걱정이 태산이다.~> 학문을 끊어 아무 근심이 없다(20장).
굽히면 자존심이 상한다.~> 굽힘은 곧 온전함과 같다(22장).
명예가 높으면 손에 꼽힌다.~> 손꼽히는 명예에 이르면 명예가 없다(39장).


노자는 무는 가치 없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너무 강해 반복적으로 작용하는 무의 가치를 강조한다. 또한 유는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해 잡거나 정당한 대가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덕은 놓아주어야 덕이 있다고 역설한다.



도의 모호성

도를 글과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도의 특성: 애매모호하다. ② 글과 말의 개념화 한계: 문자와 말로 본질을 정확히 반영하기 어렵다. 또한, 인식 주체가 변화하거나 처한 상황이나 느낌이 변하면 달리 표현될 수 있다. ③ 인식 주체의 한계: 인식 주체인 인간은 우주의 일부분이며, 전체를 조망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또한, 커뮤니케이션에도 한계가 있다. 문자와 말로 표현된 내용을 오해할 수 있다.


‘도는 애매모호하다.’

도는 음양이 뒤섞여 하나가 된 상태다. 양도 아니고 음도 아니다. 양이기도 하고 음이기도 하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다. 형상도 실체도 없다(14장). 없는 것 같지만 작용은 끊이질 않는다. 위와 같은 것을 어떤 글자와 어떤 말로 단정 지어 부를 수 있을까?


‘본질을 글과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글과 말로 이름 지을 때 사물을 개념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름은 무수한 특성 중 일부 특징을 발췌하여 개념화하고 그 특성이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한 것에 불과하다. 본질이 아닌 어떤 하나의 특성 표현이다. 개념화하는 순간 이름이라는 껍데기만 남고 본질은 사라진다. 또한 관찰자가 다르거나 사물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면 이름의 느낌이 달라진다.


개념화의 한계로 인해 본질을 글과 말로 정확히 묘사하려면 무수한 가정을 써야 한다. 그러나 가정을 늘릴수록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이름 붙이기 위해 가정을 다는 순간 그 가정이 변한다. 이름 붙인 사물은 그 사물이 아니고 과거에 존재했던 사물이 되고 만다. 가정이 변하는 이유는 사물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고, 관찰자도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


도의 깨달음을 글과 말로 전달할 수 없다. 마음으로 도를 느낄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오래 살면서 길게 수련한 사람에게 한 수 배우는 것이 좋다. 시작과 끝, 반전과 순환을 모두 경험한 사람이 도의 본질을 깨달을 확률이 높다.


‘인식 주체인 인간에게 한계가 있다.’

우주에서 인간은 티끌 같은 존재다. 우주를 움직이거나 우주의 섭리를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주와 자연의 이치를 큰 시각으로 내다보고 직관적으로 느낄 수 없다. 변하는 우주의 일부분으로 존재한다. 이런 인간이 우주의 운영원리인 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도덕경의 주요 단어

도덕경에서 쓰인 한자 중에 지금은 변해 어감이 달라진 단어들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다만 부자연스러운 경우 내용에 맞춰 해석했다.


'자연(自然)'

스스로 그리함, 스스로 그리됨, 저절로 그리됨, 자발성, 자율성, 모든 존재에 내재된 본성을 뜻한다. 자연은 현대적 어감으로 산, 강 등을 말한다. 17장에 자연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대자연의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 그리함으로 사용하고 있다. 천지 만물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특성(본성)이며, 때나 조건이 되면 스스로 생성, 발전, 변화와 소멸하는 자발적 에너지를 뜻한다. 예로 명령하지 않아도 오는 봄의 자발성, 아끼는 리더를 따르는 백성의 자발성을 들 수 있다. 그리하겠다는 생각이 없이 무의식적인 본성에 따라 ‘저절로 그리됨’을 뜻한다.


'도(道)'

창조자, 자발적 본성의 합, 작용이 있는 없음(眞空), 존재의 비존재를 뜻한다. 도는 만물을 낳았으므로 창조자고(1장, 51장), 만물의 운영원리다. 도는 모든 존재에 내재된 자발적 에너지의 합이다(道法自然- 35장). 또한, 비어 있으나 작용하는 진공(眞空)이다(4장).


'덕(德)'

만물의 양육자(51장), 도의 현상, 자발적 에너지인 도의 발현(형태를 드러냄), 없어지는 있음, 비어 있는 유(妙有), 비존재의 존재, 덕성을 뜻한다. 만물에 스며든 도를 덕성, 행동으로 발현된 도를 덕행이라고 한다(21장). 덕성은 작용하나 비어 있는 도와 같은 성질이 있다(21장). 무언으로 말하고 무위로 행동하며 공덕에 머물지 않는 것이 도를 따르는 덕스러운 언행이다.


'무(無)'

도의 본체, 작용하나 없는 존재를 뜻한다. 단어 자체의 뜻은 없음인데 도덕경 번역 시에는 도를 지칭한다. 작용이 있는 없음(眞空)의 의미로 해석했다. 물리학자들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없음 안에 밀어내는 에너지인 진공 에너지가 요동치고 있다. 사실상 무는 전혀 없음이 아니라 있음을 낳는 없음인 셈이다. 무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의미로 비존재인 공(空)과 존재인 색(色)의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다.


'유(有) '

도의 현상, 덕, 비어 있으나 있는 존재, 없어지나 현재 있는 존재를 뜻한다. 단어 자체의 뜻은 있음인데 도덕경에서 없어지나 현재 있는 존재(妙有)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존재하는 만물은 결국 없어진다. 변하지 않고 무한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존재는 없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늘 변한다. 사실 유는 항상 있는 존재가 아니라 없음을 내포한 있음인 셈이다. 유(有)는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의미로 존재인 색(色)과 비존재인 공(空)의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다.


'천지(天地) '

우주나 온 세상을 뜻한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하늘과 땅인데 천지는 관용어로 우주나 온 세상을 뜻한다. 그러나 문맥에 따라 일부 장에서는 하늘과 땅으로 해석하는 게 자연스러워 하늘과 땅으로 번역했다.


'선(善)'

도에 맞다는 의미다. 선(善)은 착하다는 뜻인데 현대적 어감으로 ‘순진하다’는 느낌으로 들린다. ‘도에 맞다, 선하다’로 번역했다.


'신(信)'

믿음, 참됨, 진실됨, 꾸미지 않음의 의미다. 예로 信史可据(참된 역사는 근거를 밝힐 수 있다)를 들 수 있다. 번역 시 내용에 따라 ‘참되다, 진실되다, 믿다’로 번역했다. 言善信(말이 아주 참되다- 8장), 信不足焉(믿음이 부족하다- 17장), 其中有信(그 안에 참됨이 있다- 21장), 信言不美(참된 말은 꾸미지 않는다- 81장) 등으로 해석했다.


'위(爲), 무위(無爲)'

통상 위(爲)는 ‘~위하여, 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즉 자연의 이치에 따르는 것보다 자기 이해득실을 따져 자기를 위하여 자기 생각대로 행하거나, 어떤 목적이나 결과를 위하여 의도적으로 한다는 의미다. '의식적으로 하다, 의도적으로 하다'로 번역했다.


무위(無爲)는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나오는 행위, 목적과 의도된 계획이 없는 행위를 말한다. 무위(無爲)를 '의식적으로 또는 의도적으로 하는 게 없다.'로 번역했다. 가능한 왕 개인의 행위와 관련하여 무위(無爲)를 쓰는 경우 '의식적으로 하는 게 없다.'로, 시키는 주체와 대상이 있는데 무위(無爲)를 쓰는 경우 '의도적으로 하는 게 없다.'로 쓰이나 문맥과 전체 문장의 글자수를 고려했다. '왕이 의도적으로 하는 게 없어(無爲), 백성은 자발적으로 한다(自然).'를 예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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