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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작가 Jul 01. 2024

나의 신규는 이랬습니다-1

안다. 나는 아직 2년 차고, 여전히 누군가는 나를 아직 충분한 자질을 갖춘 간호사로 보지 않을 걸. 그렇지만 아무것도 몰랐던 1년 차 간호사였던 나와 지금의 나는 확연히 다르고 지금 나는 2년 차 간호사로서 만족할 정도의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부족하지 않다.


1년 차의 나는 독기가 가득했다. 오히려 그때는 지금보다 내가 하는 행위에 대해 무서운 게 많아서 더 치열하게 버티고 또 공부했다. 산부인과 병동에서 일했다고 하면 흔히들 아기를 많이 안아봤지 않냐, 아기를 직접 받지 않냐 묻고는 한다. 아니었다. 내가 일한 부서는 신생아가 아니라 산모를 보는 부서였다. 그러니까, 아기를 낳기 위해 온 산모를 수술실에 보내고 또 (제왕절개든 자연분만이든) 아기를 낳고 온 산모를 수술실에서 받는 부서인 거다.


학생 때의 나는 여성간호학을 참 싫어했는데, 그때는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내가 산부인과 병동에서 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내가 일한 병원은 내가 사는 지역에서 분만수 1위를 기록하는 병원이었고 산부인과 원장만 8명 되어 외래가 늘 산모들로 가득했던 그런 병원인 것이었다.


그런 내가 그 병원에서 일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조건 ‘버텨야’ 했다. 내가 일할 때 나간 신규만 네 명, 나와 같이 살아남은 한 명의 신규는 내가 나가기 전 제일 마지막에 들어왔고 그 이후 최근에 연락이 닿아 다른 곳에서 열심히 버티고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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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로 보내기 위해서 늘 18 게이지로 라인을 잡아야 했는데 유난히 실패하며 힘겨웠던 시간이 있었다.-신규이니 당연한 거지만-내가 실패하면 얼마나 더 아플지 잘 알기에 모든 산모와 부인과 환자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자괴감에 빠져 살았는데 그 실패를 이겨내기 위해 나이트 때 한동안 내 손과 팔다리에 연습을 했다. 그리고 퇴사할 때쯤에는 모든 산모와 환자들의 라인을 내가 잡았고, 다른 선생님이 실패한 사람도 내가 가서 잡았다.


처음에는 사람의 혈관에 카테터를 직접 넣어야 하는 행위가 무서웠고, 피를 뽑는 것도 무서웠고, 수액속도를 조절하는 것도 어려웠다.-그 병원에서 도시플러는 거의 쓰지 않았다.


쓰리나이트 후 거의, 늘, 대부분 한 개의 오프뿐이었고 이브데이가 한 달에 몇 개나 있었지만 굴하지 않고 일했다. 나중에는 이브데이를 할 때 집 가지 말고 여기서 자고 일어나서 일할까요-하는 농담도 선생님들과 웃으며 주고받았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중에는 걷고 있는데도 잠에서 깨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오프날도 새벽 두 시에는 배가 고팠고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나보다 더 심하게 힘든 다른 선생님들의 듀티를 보면서 위안을 삼았다. 그곳에선 차지선생님도 삼 교대를 다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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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 보면 다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버티고 버틴 시간이 모여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그 시간은 온전히 나 혼자 버텨낸 건 아니었다. 나중에 다른 에피소드에서 전하겠지만 내가 여전히 사랑하는 나의 첫 프리셉터 선생님, 그리고 나를 많이 아껴주시고 버티도록 도와주신 차지선생님, 늘 묵묵히 나를 도와주셨던 선생님, 또 든든한 버팀목 같았던 수선생님.


나는 참 많이 사랑받았다. 내 실수를 혼내고 칭찬을 아낌없이, 또 애정도 가득 주셨던 그분들 덕분에 나는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늘 감사한 생각을 가지고 산다. 내 부끄러운 실수와 모습들도 귀여워해주신 그분들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실수가 마냥 두려웠고 도움받는 게 어색하고 싫었던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모든 면에서-특히 감정의 면에서-미숙했고 나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기도 했기에 사실 그때는 그렇게 사랑받는 게 싫기도 했다. 나 같은 신규가 또 오면 좋겠다는 말도, 나는 잘할 수 있을 거란 말도, 나는 어디서든 예쁨 받을 거란 말도, 너무 큰 무거움으로 다가왔다. 도망치고 싶을 만큼. 난 지금 그때의 그 사랑들이 얼마나 감사한 사랑이었는지 매일 느끼고 있다. 당연한 마음들이 아니었다.


지금 나는 그때 썼던 토니켓을 여전히 잃어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다. 나의 행운의 토니켓이랄까. 오늘도 그 토니켓으로 두 명의 환자에게 IV를 한 번만에 성공하고 퇴근했다. 요즘은 카테터를 한 개만 가지고 환자에게 간다. 한 번만에 할 수 있을 걸 알거든. 나는 그만큼 성장했다. 주머니에 카테터를 몇 개씩 꽂아놓고 바들바들 떨면서 환자에게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나의 신규 때를 잊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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