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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Jan 03. 2023

#58. 지선에 대하여

지선의 생일을 기하여

지선을 처음 만난 건 2022년 2월 21일 새벽 공항에서였다. 아프리카 초행인 나는 마다가스카르에 갓 내린 마린이였고, 지선은 아프리카 수년 차의 베테랑이었다. 처음 지선을 보았을 때, 나는 지선이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아프리카 고인물의 여유 넘치는 바이브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선은 말 그대로 키가 컸다. 그냥 큰 게 아니라, 정말로 많이 컸다. 190에 가까운 지선은 문짝 같은 그림자를 끌고, 내게 걸어왔다.


직장 동료로서 지선은 조용하고 차가웠다. 나는 한동안 지선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지선이 평범하게 조용하고 차가운 사람이었다면, 그렇게까지 흥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지선은 겨울바람처럼 쌩하다가도, 적재적소에 나타나 호의를 베풀곤 했다. 그건 그냥 문을 열어주고, 자리를 양보하는 류의 호의가 아니었다. 그건 결핍을 채워주는 류의 호의였다. 내가 감추거나, 지나가는 말로 문제나 결핍을 드러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뜬금없는 맥락에서 냉한 얼굴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가져오는 식이었다.


사실 그마저도 흥미로웠다. 해결책을 원치않는 선물처럼 떠안기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쪽에 가까웠다. 한발 물러나 선택권을 주는 담백함이 좋았다. 그러니까, 지선은 타인에게 예민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나는 지선을 묘사할 때, “흰자로 사람들을 다 지켜본다”며 놀리곤 한다. 그건 지선이 세상 무심한 벽 같은 얼굴과 눈빛을 하고선, 사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지선의 집에서 동료들과 저녁을 먹을 때, 내가 소스를 흘리자마자 동시에 가까운 반응 속도로 (심지어 내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티슈를 내밀던 지선을 보고, 혀를 내두른 적이 있다. 그게 지선의 천성이라는 것을 그때 납득하고 말았다.


지선의 집은 늘 깨끗하게 정돈되어있다. 셔츠나 바지는 깔끔하게 다려져 걸려 있고, 물건들은 모범생처럼 가지런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냉장고 안의 채소들은 사용하기 편하게 다듬어져 있고, 요리에 필요한 주방용품이나 각종 향신료도 곳곳에 놓여있다. 지선은 훌륭한 생활인이다. 나는 그런 지선의 단정한 성격과 야무진 손끝을 좋아한다. 자신의 공간을 깨끗이 치우고, 제 손으로 건강한 밥상을 차려내는, 그것이 수고인지도 모르는 그 부지런함을 동경한다. 나는 지선을 보며 생활을 기꺼이 돌보고 가꾸는 법을 배우고 있다.


지선이 특별한 이유는 타인에게 예민하지만 함부로 호의를 들이밀지 않는 성격이나 생활을 대하는 단정한 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지선은 나를 입체적으로 아는, 드문 사람들 중 하나이다. 나를 낳은 나의 부모도, 가장 가까운 친구나 옛 애인들도 내 사회적인 얼굴은 본 적이 없다. 지선은 일터에서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 그리고 일터 바깥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내 감정상태가 어떤지, 좋아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아끼는지, 어떤 인간들을 경멸하며 못 견뎌하는지 안다. 가족 앞에서, 가까운 친구들 앞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도.


나는 나를 아는 지선의 앞에서 자주 무방비해진다. 무방비한 상태의 나는 무신경하고, 상스럽고, 속물적이며, 덜렁거리고, 때로는 미련하다. 그런 모습을 일부러 보이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잘 숨겨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선은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나는 그것이 나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한 아첨이나 거짓이 아님을 알고 있다. 지선은 나의 무방비한 모습들 속에서도, 나의 선함과, 진실된 호의와, 따뜻한 인정을 본다. 아무도 모르는, 애초에 관심도 없는, 내 안에 숨겨진 나의 가장 좋은 면을 알아보는 사람. 그걸 보는 몇 안 되는 이가 바로 지선이다.


생활인인 지선의 곁에서 나도 어엿한 생활인이 되어간다. 성실하게 일하고, 부지런히 운동하고, 든든하게 끼니를 챙기며, 크리스마스를 맞아 조그만 장식 트리를 설치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곳곳에 붙이며 내 일상과 공간을 꾸미기도 한다. 생활인이 되면서 나는 조금 더 밝고, 조금 더 가벼워졌다. 내 안을 파고 드는 우울이나, 깊은 상념이 사라진 자리에 오늘의 작은 행복과 내일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이 찾아 들었다. 그것이 그리 나쁘지 않다.


1 3일은 지선의 생일이다. 생일에 무감한 지선에게 재미있는 선물을 해주고 싶어 고민하다가, 지선의 관찰기를 써주자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쓰다보니 결국   이야기가   같다. 그렇지만 그게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다. 때때로 나는 지선을 알아가는 것이, 나를 알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지선을 관찰하면서 차분하고 이타적인 품과, 가볍고 단순한 생활의 미학을 배운다. 오늘의 나는 여전히 무방비하지만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좋은 사람이 되길 다짐한다.


나와 닮은 사람이 아니라, 내가 닮아가고 싶은 이가 곁에 있다는 것. 그래서 그 사람의 이야기가 결국 내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멋진 일이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하루가 반복되겠지만, 오늘이 지선의 수많은 평범한 날들 중, 가장 따듯하고 다정한 하루이기를 바란다.


지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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