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돌 Nov 23. 2022

[Interview] 예상 너머에 서있는 사람

-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나요?

저는 어릴 때부터 장래 희망에 집착했었어요. 무슨 일을 하는지가 제 정체성을 정립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7살짜리 애가 고지식하다는 말을 듣기가 쉽지 않잖아요. 근데 유치원 선생님이 보시기에 제가 좀 그런 거예요. 혼자 몇 시간을 모래밭에 앉아있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너무 자기만의 것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그래서 엄마는 저를 밖으로 내보내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게 예체능을 시키셨어요. 운동은 나가떨어졌고 피아노는 4~5년을 배웠는데 아직도 악보를 못 읽어요. 저는 미술이 재밌더라고요.


중학교 때 꿈은 일러스트레이터였어요. 혼자 그림 그리는 게 좋았어요. 근데 엄마는 제가 어느 순간 재능의 벽에 부딪힐 텐데 그걸 못 견딜 거로 생각하셨어요. 제가 방학 내내 틀어박혀서 그림만 그리니까 바가지로 맞아가면서 엄청나게 싸웠죠. 그때는 그걸 쟁취하는 게 제 삶의 전부인 줄 알았어요. 근데 저도 어느 순간 납득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 급하게 진로를 틀어야 했는데, 영화를 좋아했고 방송부 안에서도 연출을 계속했었거든요. 영화라는 게 사실 순수예술은 아니잖아요. 순수예술은 그 안에서 현실적인 시선들을 가끔 외면해야 할 때가 있잖아요. 로맨틱한 상상들이 분명히 필요할 텐데 그게 제 체질과 안맞다고 생각하셨던 거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모든 걸 정해주신 것 같은데 결정은 제가 하고 엄마는 옆에서 계속 언질을 주셨던 거 같아요. 결론적으로 봤을 때 좋은 조언이었고 갈등도 좋은 장애물이었어요. 

학교에 들어와서는 나름대로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고 여러 가지 영화 현장들을 경험했어요. 현장 일을 하다 보니까 다시 순수예술에 대한 열망이 끓어올랐어요. 근데 현실적으로 3~4회차 촬영하고 나면 2~3일은 누워있거든요. 에너지를 다 소비해서 제 작업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올해 처음으로 휴학했어요. 앞으로 작업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확실해진 것 같아요. 3년간 쓴 메모장을 본 적 있는데 중간중간에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한 일기가 있더라고요. 그걸 보고 내가 갑자기 영화에 지쳐서가 아니라 늘 글을 쓰고 싶었다는 걸 느꼈어요. 저는 제 안에 있는 이야기가 많아서 계속 풀어내야 하는데 말로는 다 해소도 안 되고 부작용도 큰 거예요. 근데 그걸 온전하게 채워주는 게 글이더라고요. 요즘은 말과 글의 균형을 맞추면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시, 소설, 시나리오 집필부터 영화 연출 및 편집까지 동시에 여러 방면으로 창작하기에 어려움은 없나요?

저는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예술가가 되겠다고 맨날 큰소리치고 다녔는데, 그런 사람들 보면 평생 한 우물만 파잖아요. ‘이렇게 여러 곳에 발을 걸치고 있어도 되나?’ 싶었어요. 근데 글을 쓰다 보면 시는 대사를 쓸 때 좋고, 소설은 플롯을 짤 때 좋고, 시나리오는 시를 쓸 때 장면화가 되고, 이런 식으로 다 연동이 되어있어요. 지금은 어차피 배우는 거고 아직 등단에 목표는 없어서 다양하게 작업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사람들한테 얘기할 때는 딱 하나로 정해야겠다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하나로 안 묶이니까 제가 좀 붕 떠 있는 사람 같은 거예요. 그때 남자친구가 그런 얘기를 한 적 있어요. “직업 호명이 중요한가? 그건 어쨌든 남이 불러주는 거잖아. 하나로 정하는 게 깔끔할 순 있어도 그게 지금 너의 욕망과는 안 맞는 것 같아.” 그 말이 와닿았어요. 지금은 길게 설명할 기회가 있으면 얘기하지만, 평소에는 그냥 영화 할 거라고 대답해요.


-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요?

지금의 저를 구성하는 건 모든 면에서 안정된 것 같아요. 저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환멸을 많이 느낀 게 올해 초였거든요. 저는 그동안 저한테 만족하면서 살아왔어요. 열심히 하면 운도 따라주고 사람들과도 잘 지내고, 싸워도 기억을 잘 못 해요. 그래서 아쉽거나 슬픈 감정은 묵혀둔 채로 합리화를 하면서 살아왔다는 걸 자각하게 됐어요. 특히 대화하는 과정에서 현타를 많이 느껴서 말 자체가 소름 끼치도록 싫은 거예요. 결정적으로 제가 들뜨는 게 싫었어요. 제가 들뜨게 되는 순간 늘 돌아와서 후회하더라고요. 사실 밥도 잘 안 먹고 잠도 잘 안 자니까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도 물론 문제가 있었겠죠. 그래서 올해 초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몇 달간 숨었어요.  


제 삶이 안정된 가장 큰 이유는 남자친구인 것 같아요. 연애를 3년 정도 했는데, 저랑 다르게 그 친구는 잘 들뜨지 않아요. 식성도 다르고 취향도 다 다른데 공통으로 유머 코드가 잘 맞고 둘 다 자기 작업이 제일 중요해요. 서로 작업에 대한 이해가 있고 같이 만들고 싶은 게 있으니까 그걸 중심으로 관계가 잘 이어지고 있어요.

요즘은 시랑 소설을 쓰고 영화 후반 작업을 하고 있어요. 항상 사람들이 요즘 뭐하냐고 물어보면 글은 그 자리에서 바로 보여주기 어렵고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불안함이 늘 있었어요. 제가 하는 것에 대해 증명을 못 하는 거예요. ‘내가 이런 걸 해왔어. 앞으로 기대해줬으면 해.'라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연말 선물로 주려고 썼던 글을 모아서 책으로 만들고 있어요. 


요즘은 글을 잘 쓰려고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어요. 특히 시가 유일하게 공부할 맛이 나요. 저는 늘 하고 싶은 게 생겨서 공부하면 제 실력도 같이 올라갔거든요. 근데 시는 유일하게 읽는 건 느는데 쓰는 건 하강하는 느낌이 들어요. 이 격차가 짜증 나긴 하는데 매력 있는 것 같아요.

- 작업하실 때 시간을 어떻게 쓰시는지 궁금해요.
제 생각엔 계획이 습관이 되면 계획적인 사람인데 강박이 되면 그때부터는 문제 있는 사람이다(웃음). 저는 후자예요. 시를 조금 더 감각적으로 쓰는 경향이 제게는 필요한데, 저는 첫째 연과 둘째 연의 사이즈까지 계획을 해야 쓸 수 있거든요. 늘 미리 계획하고 리스트업하려는 강박이 있어요. 동시에 미루기 광이에요. 마감 전에 속도를 내면 나름대로 결과물도 만족스러우니까 그게 맞는 줄 알았어요. 근데 그러면 작품의 질이고 뭐고 건강이 망가지더라고요. 글을 쓰고 싶어도 몸이 아파서 못 쓰는 일을 겪으니까 건강은 절대적으로 지켜야겠다고 느꼈어요.


그래도 아직은 저한테 성취감과 에너지가 소모되는 과정만큼 쾌락을 주는 게 없어요. 그 행복을 다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글을 쓰는 과정에는 엄청난 쾌락이 있거든요. 늘 그 쾌락을 맞이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나요?

내년에 1년 동안 미국에서 살다가 돌아와서 어엿한 내 작품 하나 만들고 졸업하고 싶어요. 그리고 다시 미국에 가서 일할 생각이에요. 할리우드 상업영화 각본을 쓰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이건 제 꿈이고요. 외국에 나갔는데 안 맞으면 또 달라지겠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계획은 이 정도인 것 같아요. 


원래 5~10년 단위로 계획이 있었는데 압도되더라고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변수가 많다는 걸 사회에 나와서 알게 됐어요. 지금 저는 제 삶에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겨우 성장했는데, 또 무슨 문제가 나를 힘들게 할까? 예상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냥 첫째로 무슨 일이 있어도 글을 쓸 생각이에요. 그리고 스타일리시하게 살고 싶어요(웃음). 작가로서 어떤 작품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지에 대한 계획은 구체적으로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건 좀 시간이 걸릴 거 같아요. 일단 지금은 산에 올라가서 물 맞으면서 노래하는 것처럼 연마하는 시기예요.


저는 예술 쪽 일을 하니까 모든 걸 예상하려고 하면 결말이 너무 뻔하게 나와요. 내가 예상할 수 있는 풀 안에서만 노니까 새로운 게 안 나오는 거예요. 요즘 찾은 방법의 하나는 ‘그럼 내가 예상할 수 있는 풀을 더 넓히자.’예요. 나라는 사람은 못 바꾸니까.


- 주변에서 가장 예술답다고 생각한 것이 있나요?

풍경화, 정물화, 초상화가 있으면 저는 초상화 파였어요. 그림이나 사진을 봤을 때 그 안에 인간이 담긴 걸 좋아해요. 자연이나 풍경에 대한 흥미는 별로 없었어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 제가 길가에서 어떤 풍경을 카메라로 찍고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느낀 점은 눈으로 본 걸 카메라가 못 담는다는 거예요. 제가 재개발 구역 앞에 살았거든요. 아침에 일어나면 집이 무너지고 있어요. 무너진 공간이나 건물을 무너뜨리고 있거나 비어있는 곳이 주변에 많아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그 풍경이 예술 같은 게 아니라 그 풍경에 멈춰서는 그 순간의 내가 예술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평소엔 우리가 P.O.V(point of view)로 세상을 보잖아요. 근데 가끔 멀리서 롱 샷으로 저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 식으로 그 순간을 기억하거든요.

매거진의 이전글 [Interview] 원하는 걸 눈앞에 그려내는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