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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Dec 17. 2023

냉장고가 죽었다.

무언가를 정리하고 털어내 버리는 불편한 대면의 순간

냉장고가 죽었다. 향년 13세의 나이였다.


년 전부터 냉동실 성에가 늘더니 몇 달 전에는 맨 아랫칸 음식들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했다. 이때 눈치챘어야 했다. 죽어가는 기계의 마지막 경고를.


 열흘 전 둘째 별이는 독감에 걸렸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걸 옮겼다. 병에 걸려 제대로 서있기도 힘든 지난 주말. 냉장고 속 온도가 평소처럼 차갑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꽁꽁 얼어 있어야 할 고기와 생선들이 무르기 시작했다. 당장 냉장고를 열어 청소를 시작해야 했지만

할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났다. 비로소 냉장고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700리터가 넘는 공간 속에 쓰레기가 가득 차 있었다. 이미 건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 해치워버리고 싶지만, 아이를 등교시키고 하교시키느라 나가야 했고, 주문 들어온 팔찌들도 만들어야 했다. 예약해 둔 스튜디오와 병원도 다녀와야만 했고, 때 되면 아이들을 씻기고 먹여야 했다. 남편은 계속 퇴근이 늦었고, 내 체력은 바닥이었다.


 점점 냉장고 문을 여는 게 두려워졌다.


 치워버려야 할 것들을 대면하는 일. 피할 수 없는 일들인데 피하고만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드디어 아무 일정이 없는 날. 아이들을 보내고 냉장고 문 앞에 섰다. 창문을 활짝 열고 마스크를 꼈다. 냉동실을 열어 이제는 썩기 시작하고 있는 고기와 생선들을 꺼냈다. 냉동실 아래 서랍 하나 정리하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안동 간고등어들. 야무지게 소분해 두고 까먹어버린 다진 고기, 햄버거 패티들. 모두 내가 사모아 두었던 것들이었다. 냉동실에 처박아두고 마음 편히 잊어버리고 지냈던 것들.


 해묵은 기억들을 꺼내어 정리하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고역스러운 일들이었다. 굳이 대면하고 싶지 않았던 식재료들의 민낯을 보는 것은 불쾌하고 힘들었다. 그리고는 냉장고에 빈 공간이 늘어날수록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그게 음식이 기억이든 간에 무언가를 정리하고 털어내 버리는 것은 불편한 대면의 순간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마주할 용기는 줄어들고 어떻게든 처박아두고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들.


 우리 머릿속 저장 용량에 냉장고처럼 한계가 있다면,

문득 어느 날 고장이 나 다 내버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괴롭더라도 이렇게 털어내 버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험한 꼴을 보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것들에게는

더 이상 아무 미련도 남지 않았다. 언젠가는 저걸 먹어야 하는데. 또는, 언젠가는 저걸 버려야 하는데. 그동안 냉장고를 열 때마다 들었던 알 수 없는 죄책감에서 비로소 해방되는 기분이었다.



냉장고 청소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새 냉장고는 청소가 끝나야 주문할 수 있을 것 같다. 쿠팡에서는 냉장고도 이틀 만에 배송해준다고 한다. 내가 얼마나 빨리 버리고 정리할 수 있는지가 유일한  문제일 뿐이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고장이 난 게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존재조차 잊어버렸던 간고등어 같은  무거운 기억들을 한가득 지고 사는 삶이

더 고될지도 모른다.


털고 버리는 것은 살면서 꼭 필요한 일임이 분명하다. 나처럼 게으르고 용기 없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냉장고 #고장 #정리 #대면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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