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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toyourverse Jun 03. 2019

장수 고양이의 비밀과 싱크로니시티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집 <장수 고양이의 비밀>

지난밤에 여자 친구와 어린이대공원에 산책을 갔다. 하늘이 어둑해졌을 무렵. 분수 근처에 앉아 얘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 쪽으로 운동복 차림의 여자와 고양이가 인기척도 없이 가까이 다가왔다. 짙은 회색빛 고양이는 우리한테도 살갑게 다가올 것처럼 하다가 주인 눈치를 살피더니 제자리에 멈췄다. 그들은 얼마간 그 자리에서 교감을 나누더니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고양이도 하루키의 뮤즈처럼 산책을 좋아하는 고양이었던 것 같다.


다음날 내가 주문한 적 없는 택배가 도착했다. 어리둥절 하긴 했지만, 특별히 누군가한테 나쁜 소포를 받을 정도로 나쁘게 살지는 않았으니까 일단 수령했다. 문학동네에서 온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이하 하루키) 신간 에세이집이었다. 그제야 문학동네에서 모집한 하루키 에세이 클럽에 지원했던 게 떠올랐다. 별다른 완충제 없이 종이포장만으로 배송됐지만 흠집 하나 없이 도착해서 신기했다. 예고 없이 불쑥 도착한 책이 하루키 작가의 세계관과 어울렸다. 책과 독자의 운명도 작가를 닮아가나 보다. 전날 밤 그 고양이가 옛다 책 선물을 던져주고 간 것 같다. 에세이집을 읽다 보니 이런 현상을 두고 '싱크로니시티'라고 하더라. 며칠이 지나 문학동네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안내 문자를 받았다. 일반 전화번호라서 잘 받았다는 회신은 할 수 없었다.


책을 읽다가 잠시 졸다가 했다. 지루한 것은 아니고 하루키의 에세이는 독자로 하여금 긴장을 풀고 느긋하게 만든다. 안자이 미즈마루의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일러스트도 거기에 한몫한다. 이 책은 1995년부터 약 1년간 '주간 아사히'에 연재된 에세이를 한데 모았다. 비록 20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꼭 시대성에 직결되는 소재는 아니라서 괜찮았다. 오늘날에도 통용될만한 이야기가 많다. 제목에도 등장하는 하루키의 신비로운 고양이 뮤즈의 이야기부터 사사로운 곳에서 발생하는 하루키 특유의 유머, 쿨함 속에서 언뜻 내비치는 서투르고 인간적인 모습까지. 하루키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투쟁하기보다는 특유의 문체로 작은 파장을 일으킨다. 개선되면 좋지만 안 돼도 별 수 없다. 신문에 연재했던 에세이었던 만큼, 독자가 보낸 반론에 대한 하루키의 답변이 후기에 실려있다. 독자의 논리에 적당히 수긍해줄 만도 하지만 하루키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부담 없이 아무 때나 가볍게 어느 페이지를 펼쳐 봐도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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